
“향취는 사람의 코를 찌를 뿐 아니라 보기에 먹음직합니다.”
이 글은 1929년 12월1일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 제24호에 실렸다. 글쓴이는 경남 진주에 있는 비봉산(飛鳳山)에 빗대어 필명을 ‘비봉산인’으로 삼은 문학인으로 여겨진다. 그가 찬사를 보낸 음식은 바로 ‘진주명물(晉州名物) 비빔밥’이다. 다음글에서 비봉산인이 자랑한 진주비빔밥의 맛을 따라가 보자.
글은 “맛나고 값 헐한 진주비빔밥은 서울비빔밥과 같이 큰 고기점을 그냥 놓은 것과 콩나물(의) 발이 세 치(약 10㎝)나 되는 것을 넝쿨지게 놓은 것과는 도저히 비길 수 없습니다”로 시작한다. 비빔밥은 그 당시 도시 번화가 음식점의 핵심 메뉴였다.
이어서 비봉산인은 “하얀 쌀밥 위에 색을 조화시켜서 날 듯한 새파란 야채(채소) 옆에는 고사리나물 또 옆에는 노르스름한 숙주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각색 나물을 둘러놓은 다음에 고기를 잘게 익혀 끓인 장국을 부어 비비기에 적당할 만큼 그 위에는 유리 조각 같은 황(黃)청포 서너 사슬을 놓은 다음 옆에 육회를 곱게 썰어놓고 입맛이 깨끔한(깨끗하고 아담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라고 썼다. 새파란 채소는 상추다. 고사리나물·숙주나물·황청포묵·육회가 쌀밥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당시 진주엔 전국적 규모의 우시장이 장날마다 열렸다. 그래서 쇠고기 육회가 비빔밥에 들어갔다. 하지만 상온에서 유통돼 냄새가 날 수 있어 고추장을 얹어 비빔밥 맛을 깨끔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차려진 비빔밥이 식탁 위에 오르자 비봉산인은 “여기에 일어나는 향취는 사람의 코를 찌를 뿐 아니라 보기에 먹음직합니다”라고 군침을 삼켰다. 그러면서 “값도 단돈 10전”이라며 “상하 계급을 물론하고 쉽게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1929년 보통학교 교과서 1권 값이 10전이었다. 육회가 들어간 비빔밥이 10전이면 정말 ‘단돈’인 셈이다. 비봉산인의 마지막 찬사는 “이렇게 소담하고 비위에 맞는 비빔밥으로 길러진 진주 젊은이들은 미술의 재질이 많은 것입니다. 또한 의기(義氣)의 열렬한 XX정신을 길러주는 것입니다”로 마무리된다. 그는 갖은 색의 비빔밥을 자주 먹은 진주 젊은이들이 미적 감각을 지녔다고 보았다. 마지막 문장의 ‘의기’는 논개를 가리킨다. ‘XX’는 아마도 ‘저항’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엄혹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이렇게 인쇄됐다.
조선시대 소 도살업에 종사한 사람은 ‘백정’이라 불리며 큰 차별을 받았다. 1910년대 진주에는 300명 넘는 백정이 있었다. 그들은 1924년부터 차별 철폐를 위한 ‘형평사’를 조직해 사회운동을 펼쳤다. 이들이 제공해준 육회비빔밥에 당연히 ‘저항 정신’도 비벼져 있었을 것이다. 음식은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는 매개물만은 아니다. 나와 공동체가 즐겨 먹는 음식에는 역사와 정신도 담겨 있다. 이 점을 잊지 말자.

주영하 음식 인문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