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비명(悲鳴)소리] 싸늘해진 회사

2024-09-07

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 소설가)의 1980년 삼청교육대 수난기(受難記)를 연재한다. 울산MBC 기자였던 최종두 고문은 198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연재 글에는 인권을 짓밟는 ‘삼청교육’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1970~80년대 울산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계 비사(祕史)도 엿볼 수 있다. 최 고문은 “1980년대는 찬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영혼을 뭉개버리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전주 같은 목봉을 힘겹게 들게 하면서 서막을 열었다”며 “몽둥이와 총으로 지레 겁을 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 제5공화국의 주구들”이라고 술회했다. <편집자 주>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전무를 만났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나 전무는 인사를 받기는커녕 아주 싸늘한 표정으로 “최 기자”하고 불렀다. “네, 전무님.”하고 대답하니 “내 방으로 가자”면서 도로 사무실로 올라와 나와 마주 앉는 것이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혹시 내 복귀가 뒤틀려버린 게 아닌가 하고 금방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심기가 불편할 때 잘 내보이던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전무님, 뭐가 잘못된 게 있습니까?”

“있지! 있어.”

“뭡니까?”

“내가 물러가더라도 이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는 상무를 불러 같이 앉고 나서 잠시 침묵이 있은 다음 전무는 다시 말을 꺼냈다.

“구명운동을 하러 갔으면 자기만 살면 될 일이지 왜 죄 없는 우리들을 잘라내느냐 말이야!”

전무는 입술을 떨면서 금방 탁자에 놓인 재떨이를 내게로 던져버릴 기세였다. 순간 나는 설령 회사가 통고를 취소하고 해고 상태인 채로 그냥 내버려 둔다 해도 비굴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부터 내 얼굴도 굳은 채로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상무가 말을 이었다. 국보위의 지시가 방송협회로 내려왔다고 하면서 최 기자는 복직을 시키고 대신 전무와 상무는 회사를 떠나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전무는 여당인 공화당 울산 지구당에서 조직부장으로 있다가 회사로 오게 되었고 상무는 사주인 HR의 조카이면서 나이로는 나보다 연하인 학교 후배였다.

사주인 HR이 부정 축재자로 몰리고 회사를 정부에 헌납하게 하면서 당사자의 측근들을 회사의 중역으로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방침에 의한 조치였다. 그런 현실 앞에서 일개 말단 사원인 내가 누구를 두고 회사를 떠나라, 말라 할 수 없었는데도 그것을 나에게 덮어씌우는 윗사람들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사장실을 기웃거렸다. 마침 사장님이 문을 열고 오늘 12시에 00식당으로 오라고 하고는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었다. 00식당은 한정식집으로 사장님이 자주 이용하는 단골 식당이었다. 사장님은 상무가 하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사실 내 신상에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흉흉한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토호 세력과 기존의 사회 지도층에 대한 내사가 시작되었고 사회정화란 이름 아래 폭력배들을 모두 소탕한다는 소문과 함께 시장 바닥에 좌판을 놓고 콩나물 장사를 하는 아낙들 중에도 벌써 순화교육을 받고 와서 바깥 구경을 못 하고 누워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었다.

또 일선 기자로 관공서에 나쁜 기사를 쓰는 기자와 평소 감정이 좋지 못한 기자는 모조리 잡아들인다는 소문도 있었다. 내가 직접 써서 앵커까지 맡고 있던 시사 프로도 없애버리라고 했는데도 학교 선후배 관계였던 사장님은 언제나 나를 감싸주며 보호해주었다. 기관장이나 관서의 약점을 알고 있는 기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다. 여러 번 그런 얘기들이 간부회의에서 나오긴 했어도 사장님이 그걸 묵살했던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잡혀 들어야 할 사람들은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회사에 복귀해 있었으나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제일 찜찜하면서 걸리는 것이 경찰서장과 있었던 일이었다. 더구나 그 경찰서장은 그의 사무실에서 줄행랑을 친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해 잘잘못을 털고 화해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가 타지로 전출을 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이제야 한시름 놓으려니 했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진해 경찰서장에서 경남도경찰국으로 또 근무처가 바뀌었으니 직속 상부 관서로서 오히려 그에게 걸린 괘씸죄를 더 어김없이 해치워버릴 수 있는 권한을 손에 쥐게 된 때문이었다.

그도 그렇지만 회사의 상사인 전무의 얼굴을 대해야 하는 일은 죽을 맛이었다. 그는 내가 서울에 가서 구명운동을 하고는 다시 복귀하는 대신 자신을 밀어냈다고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어느 날 울산 경찰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전 아홉 시까지 경찰서 연무장으로 시간에 맞추어 가게 되었다. 그곳에 가서야 이제 때가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순화교육 심사장을 제 발로 찾아간 것이었다. 울산 경찰서의 연무장은 웬만한 학교 강당처럼 넓었다.

최종두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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