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참는다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평생을 일궈온 공장들이 날아갔으니 수천억원을 피해 봤어요.” 11년 전 세상을 떠난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 생전에 언론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이른바 ‘우지(소기름) 파동’으로 공장의 생산라인을 줄줄이 멈춰 세우고 1000명 넘는 직원을 한꺼번에 떠나보내야 했던 아픔을 이렇게 토로했다. “피오줌을 봤을 정도”라는 그의 고백처럼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도 큰 충격과 교훈을 남긴 사건이었다.
36년 전 ‘공업용 소기름’의 오명
7년여 공방 끝에 대법원서 무죄
자극적 기사 썼던 언론도 책임 커
이달 초 라면 시장에 신제품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삼양식품이 출시한 ‘삼양1963’이란 라면이다. 1963년 첫선을 보인 원조 삼양라면의 추억을 되살린다는 뜻을 담았다. 그러면서 ‘36년 만에 돌아온 우지라면’이란 설명을 붙였다. 이 제품의 출시일인 지난 3일은 1989년 우지 파동이 발생한 지 정확히 36년째 되는 날이었다. 오랜 만에 우지라면을 구입해 맛을 보니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오래 전 사건이라 청년 세대는 잘 모르는 일이겠고 중장년층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1989년 11월 3일 서울지검 특수2부는 당시로선 충격적인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식용으로 쓸 수 없는 소기름을 원료로 라면·마가린 등을 만들어 판 혐의로 삼양식품 등 다섯 개 회사의 기업인 10명을 구속했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기업 중에선 곧바로 부도를 낸 곳도 있고, 간신히 부도를 면했더라도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간 곳도 있다.
이후 법정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서울중앙지법의 1심 재판에선 유죄였지만, 서울고법의 2심 재판에선 무죄가 나왔다.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건 1997년 8월이었다.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이후 7년 9개월 만에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됐다.
이 사건은 한국 언론사에도 중대한 오점을 남겼다. 사건 초기 언론은 ‘공업용 소기름’으로 불량식품을 만들어 판 부도덕한 기업이라며 맹비난했다. 소비자는 대혼란에 빠졌고 삼양식품 등 해당 기업의 매출은 뚝 떨어졌다. 당시 김종인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이 나서 “인체에 무해하다”고 했지만, 소비자의 불신을 잠재우지 못했다. 반면에 소기름이 아닌 식물성 기름을 쓴 경쟁사 제품은 매출 급증이란 반사이익을 얻었다.
되돌아보면 언론이 사용한 공업용 소기름이란 용어부터가 문제였다. 공업용이란 단어에는 마치 기계에나 쓸 법한 기름을 사람에게 먹게 했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실상은 전혀 달랐다. 영어로는 ‘inedible tallow’, 우리말로는 ‘비식용 우지’라고 하는 게 맞았다. 이때 비식용이란 단어는 사람이 먹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쓴 게 아니었다. 우지의 원산지인 미국이 소의 도축 과정에서 식용으로 분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에도 식품이나 축산 전문가 다수의 의견은 비식용 우지에 일정한 가공 절차를 거치면 식용으로 쓸 수 있다고 했다. 신광순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비식용 우지인) 2~3등급도 정제 공정을 거치면 1등급의 품질 규격 수준으로 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식용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도 그렇게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의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미국에서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우지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에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우지라고 할 수 없다”며 “이 사건의 우지는 보건사회부 산하 검역소의 식품검사와 농림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의 축산물 검역을 받은 다음에 정제해 식품원료로 사용했다”는 것을 무죄의 이유로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언론은 자극적인 보도로 불필요하게 소비자 불안을 부추겼다는 점에서 무거운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는 “출입처 제도의 한계나 중립적인 언어 사용의 미숙, 화합보다는 갈등을 선호하는 기사가치 등은 단지 식품안전 보도에만 국한되지 않는 문제들”이라고 지적했다.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36년 전의 잘못된 언론 보도 관행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전 명예회장은 1963년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와 서민들의 식탁에 라면이란 신제품을 선보였다. 그가 ‘제2의 주식’으로 불리던 라면으로 서민의 배고픔을 덜어준 공로는 누가 뭐래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한때 한국 사회는 그에게 불량식품을 만든 악덕 업자라는 누명을 씌웠던 게 너무 미안하고 안타깝다. 어느새 한국 라면은 세계 시장에서도 통하는 제품이 됐다. 한국 라면이 대성공을 거둔 밑바탕에는 한 기업인의 귀중한 땀과 눈물이 있었음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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