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바탄과 K원전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4-10-07

루손 섬은 태평양의 섬나라 필리핀을 구성하는 여러 섬들 가운데 면적이 가장 넓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도 이 섬에 있다. 마닐라 서쪽에 있는 바탄(Bataan) 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1941년 12월7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본은 그때만 해도 미국 자치령이던 필리핀에 눈독을 들였다. 미 육군 1개 사단과 필리핀 육군 10개 사단이 방어에 나섰지만, 필리핀군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고 미군 역시 병력과 장비 면에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자 미군은 마닐라를 비운 채 바탄 반도의 요새들로 옮겨 최후의 일전을 대비헸다. 당시 미군과 필리핀군 모두를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너무나 유명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었다.

맥아더와 그의 참모진은 바탄 반도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 위 코레히도르 섬에 머물며 교전 상황을 지켜봤다. 오랜 기간 전쟁을 준비한 일본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진주만 공습 이듬해인 1942년 1월 초 무방비 상태의 마닐라는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다음 목표는 미군이 최후의 근거지로 삼은 바탄 반도였다. 저항은 3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미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필리핀만은 지켜야 한다’는 각오 아래 싸웠으나 식량 고갈과 질병 창궐에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며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바탄 반도의 미군은 1942년 4월9일 일본군에 항복했다. 그곳에서 붙잡힌 미군 포로들은 100㎞나 떨어진 포로수용소까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학대 등으로 7000명가량의 미군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바탄 죽음의 행진’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미국이 2차대전 도중 겪은 최악의 비극으로 꼽힌다.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동안 맥아더는 무엇을 했을까. 제1차 세계대전 때 커다란 전공을 세운 맥아더는 1940년대 초 이미 미국인들 사이에서 국민적 영웅이었다. 그런 맥아더가 일본 앞에 무릎을 꿇거나 심지어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 상황은 미 행정부로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일단 필리핀을 탈출해 호주에 머물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 달라”고 명령했다. 결국 맥아더는 미군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2년 3월 코레히도르 섬을 떠나 호주로 향했다. 당시 그가 필리핀 국민에게 남긴 메시지가 그 유명한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I shall return)라는 말이다. 2차대전 말기인 1945년 3월 맥아더는 일본군으로부터 필리핀을 탈환함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다. 그 뒤 맥아더는 자신의 전용기에 ‘바탄’이란 이름을 붙였다. 1942년 바탄 반도에서 미군이 겪은 치욕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필리핀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7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필리핀 정부 간 ‘바탄 원전 건설 재개 타당성 조사 협력 양해각서(MOU)’ 체결식에 참석했다. 2차대전 당시 미·일이 치열하게 싸웠던 바탄에 들어설 원자력 발전소와 관련해 한·필리핀 양국이 협력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1976년 착공한 바탄 원전은 일부 국민의 반(反)원전 정서 탓에 완공 직전인 1984년 공사가 중단됐다. 그런데 2022년 취임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현 필리핀 대통령이 고질적 전력난을 해결하고자 바탄 원전 가동을 추진하며 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바탄 원전은 우리 고리2호기와 같은 원자로를 쓰는 만큼 한수원이 원전 건설 재개를 도울 최적의 파트너로 지목된다. 필리핀은 2050년까지 원전 3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라니 이번 프로젝트가 꼭 성공해 바탄이 K원전의 필리핀 진출을 상징하는 성지로 자리매김 하길 소망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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