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굿즈에 샐러드까지… 자판기 변천사
세월에 장사 없다고, 빛이 바랜 자판기 한 대가 문구점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서울 동대문구 약령시로 한 문구점 앞에 놓인 자판기는 처음 놓인 그 자리에서 긴긴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아~ 커피 자판기는 안 한 지 오래됐어요. 5년 전쯤 그만뒀나요. 아마 자판기 커피값이 200원이나 300원 정도 할 때 그만뒀어요. 주변에 1000원, 1200원 커피집이 막 생겨서요. 자판기 커피 찾는 사람도 없고 수지 타산도 안 맞아서요.” 문구점 주인은 마치 문구처럼 순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처음 구입할 때는 수백만원 대 고가였지요. 한 20년 동안 운영했으니 비용은 뽑았겠지요. 자판기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은 문구류 넣어두는 간이 창고같이 쓰고 있어요.”
문구점 주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쓰임새가 남아 있구나. 사전은 자판기(vendin machine)를 동전이나 지폐를 지정된 투입구에 넣고 사려는 상품이 자동으로 나오는 기계라고 정의한다. 커피와 음료를 파는 자판기가 자판기의 대명사였다면, 지금은 각양각색의 자판기들이 소비자들의 욕구에 부응하고 있다.
원조 선배들이었던 자판기도 어느 동네 어느 구석에서 잊힌 채 삭아가지만 새로운 상품으로 무장한 후배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금을 팔고 샐러드를 팔고 꽃을 팔고 K-POP 시디도 판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을 팔고 있을지도…. 몇 군데를 찾아봤다. 자판기의 극히 일부 이야기만 담았다.




“필름 파는 자판기는 냉장고예요. 카메라 필름은 온도에 민감하잖아요. 그래서 적정 온도를 18도로 항상 유지하지요. 영업시간 외 필름을 사러 오시는 분들이 많이 사 가세요. 하루 10통 이상 꾸준히 나갑니다. 주말에는 더 나가요. 필름 자판기가 설치된 여긴 외국인들도 사진 찍으러 많이 오세요.”
서울 중구 퇴계로에 위치한 필름로그 현상소는 필름 자판기를 운영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가 대세인 요즘에도 필름은 꾸준히 인기가 있다. 현상소의 이다혜 매니저는 말했다. “필름 파는 자판기 역할도 하고요. 현상할 필름 접수함도 설치돼 있어 고객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어요.”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 꽃집 앞엔 꽃을 파는 자판기가 놓여 있다. “24시간 운영하지요. 한 3년 정도 됐어요. 주로 시즌 때 잘 나가는데 크리스마스엔 완판되기도 했어요. 조화지만 찾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꽃집 주인의 말이다.
서울역 공항철도 환승통로엔 K-POP 굿즈를 파는 자판기가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꽤 많은 이들이 호기심을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기념촬영도 필수다. 지하철 7호선 상도역엔 서울교통공사가 운영하는 메트로팜이 있다. 지하철 역사의 여유 공간을 활용해 채소를 생산, 재배, 판매하는 곳이다. 이곳엔 샐러드를 파는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 출퇴근 시민들이 애용하는 자판기이기도 하다. 서울 이마트 용산점에는 금을 파는 자판기가 있다. 2023년 첫 도입 이후 전국적으로 6군데에 설치돼 있다. 이마트 관계자는 정확한 매출 규모를 밝히진 않았지만, 지난해 상반기 대비 올해는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랐다고 귀띔해 준다.



이젠 사람들이 찾지 않아 마냥 낡아만 가는 자판기도 있지만, 새 아이템을 들고 짜잔~ 등장하는 자판기들도 많다. 인공지능(AI) 기능으로 무장한 자판기도 등장했다. ‘자동판매기로 다시 태어난 나는 미궁을 방랑한다’라는 애니메이션에선 교통사고로 죽은 주인공이 이세계(異世界)에 자판기로 다시 태어나 활약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하는 상품을 내어줄 수 있는 자판기의 생명력은 인간의 마음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한 무궁할지도 모른다. 자판기에 대한 짧은 이야기는 여기까지.
글·사진=허정호 선임기자 hoy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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