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귀를 막아도 들리는 비명(悲鳴)소리] 누명의 진실(3)

2025-03-08

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 소설가)의 1980년 삼청교육대 수난기(受難記)를 연재한다. 울산MBC 기자였던 최종두 고문은 198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연재 글에는 인권을 짓밟는 ‘삼청교육’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1970~80년대 울산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계 비사(祕史)도 엿볼 수 있다. 최 고문은 “1980년대는 찬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영혼을 뭉개버리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전주 같은 목봉을 힘겹게 들게 하면서 서막을 열었다”며 “몽둥이와 총으로 지레 겁을 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 제5공화국의 주구들”이라고 술회했다. <편집자 주>

운명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고향에 대한 애정과 우리 문화예술에 관한 관심이 남다르다. 어떨 땐 광적일 정도로 몰입하기도 한다. 1976년 여름이었다. 나는 일본 동경 외곽의 히라스까에 있는 화가 히라노(平野) 여사의 저택에서 이틀 밤을 쉬고 온 적이 있었다. 화가 히라노는 한국의 불교문화와 특히 불상(佛像)에 매력을 느끼면서 경주를 자주 찾아왔고 경주 남산의 불상에 대한 식견을 많이 가진 윤경렬 선생을 내가 소개하고 나서 나와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는 부산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KBS 초청 전시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던 유명한 여류화가다.

그의 집은 고려산(高麗山)이 보이는 한가한 언덕에 2000여 평이 넘는 과원으로 된 뜰과 한옥을 절충해 만든 아뜨리에까지 겸비한 대저택을 이루고 있었다. 모든 분위기를 한국적으로 꾸며 놓은 것 같았다. 치과의사인 부군도 한국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편이어서 나는 낯선 일본 땅에서도 곧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온돌방을 꾸며 놓고 김치를 즐겨 먹는 그들 가족과 해가 질 무렵 정원에 앉아 가까이 보이는 고려산을 바라보며 그가 고려산의 내력을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몇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요.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저 고려산 밑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게 되어서 산 이름도 고려산이라 부르게 되었어요. 몇 년을 그렇게 한국인들만 살았는데 어느 해부터 수년 동안을 흉년이 들었대요. 그래서 살길이 막막하게 되자 다른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떠나버리게 되었어요. 결국 마지막까지 두 가구만 남아 살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그중 한 가구도 떠나가게 되고 말았어요. 봇짐을 메고 산허리를 돌아가는 사람에게 남은 한 가구의 가장이 고함치며 말했어요. ‘다른 곳에 가서도 안 되겠으면 다시 오이소!’ 그 고함치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리자 그만 두 가구 모두가 울며 헤어져 갔대요. 그래서 다시 오이소! 하던 그 소리 때문에 마을 이름은 오이소 마을이 되었어요! 어때요? 드라마 같은 얘기죠? 나도 그 전설 같은 광경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했는데 여태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화폭에 담고 말 거예요.”

그가 가리키는 오이소 마을 쪽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그 마을을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일본에서 듣는 고려라는 그 소리는 짙은 고국의 향수를 목마를 때의 물 생각처럼 나에게 찾아드는 것이었다. 지금의 내가 고려산의 내력에 가슴이 울렁거리듯 수백 년 전 그때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의 조상들은 고려…란 그 이름을 부르며 천형을 당하듯 얼마나 괴로워하며 고국을 그리워했을까?

다음 날 오후 나는 히라노 선생과 함께 고려산 중턱에서 아담한 요(窯)를 세우고 두꺼운 색유의 막사발을 빚어내고 있는 육순을 넘은 노인을 만났다. 그를 보는 순간 또 한 번 가슴의 경련에 떨어야 했다. 분명 이 사람은 한민족의 피를 받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노인은 훤칠한 키와 넓은 허우대, 눈가의 모습으로 보아 한민족의 후예가 틀림없었다. 히라노 선생의 소개로 몇 마디를 주고받고 나서 역시 나의 짐작이 적중했음을 알았다.

나는 그 노인과 함께 있었던 때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흙은 도자기를 만드는 데 적당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죽은 흙이나 다름없는 일본의 흙에 비해 한국의 흙은 살아 숨 쉬는 흙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나는 민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그의 조상들이 도공이었던 죄로 끌려와서 고국의 흙을 그리워하던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을 흔들어 놓던 그 노인의 얼굴 표정. 그것이 나의 기억을 두드리는 듯 되살아나곤 한다. 무엇인지 모를 의분 같은 것이 솟아났고 또 무언가를 이루어 놓고 말리라는 결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 그런 결심을 더 다지게 된 것은 다음 날 경도(京都)의 어느 박물관에서였다. 몇 번이나 들여다보아도 그것은 울산에서 구워진 그릇이었다. 울산인수부(蔚山仁壽府)라고 똑똑히 새겨진 분청자기 한 점. 나의 가슴이 갑자기 뛰고 있었다. 고향 울산의 선조인 누군가가 흙을 빚고 불을 지펴 만들어낸 분청자기 한 점이 진열돼 있는 것을 보고 어찌 가슴이 뛰지 않았겠는가?

울산에는 오래된 가마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그릇을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좋다. 다만 울산의 흙으로 그릇을 만들던 이름 모를 어느 도공의 모습을 상상하며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새기면 되는 것이다.

그렇듯 귀하게 간직되는 울산의 질그릇이 그 맥을 왜 놓치고 말았을까? 어찌하여 내 고장의 전통을 잇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이 나로 하여금 도자기 가마를 세우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나는 어거지로 죄를 꾸며야 했던 자들에 의해 저승사자에게 이끌려 저승의 문 앞까지 갔다 오고 말았다.

최종두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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