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기'로 조각의 무한 가능성 실험···조각가 故 김인겸 재조명

2025-03-09

미술비평가 딸이 전시를 기획하고, 아들은 전시 작품 사진을 직접 찍었다. 그들의 아버지이자 조각가인 김인겸(1945~2018)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전시장을 채운 작품들이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그의 존재를 대신했다. 지난 6일 대구 봉산동 우손갤러리에서 개막한 전시 '조각된 종이, 접힌 조각'은 작고한 작가와 딸 김재도 홍익대 초빙교수, 아들 김산 사진작가 등 3인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작가 노트를 보면 아직 세상에 다 보여주지 못한 작품이 너무 많아요. 그게 아까워 어떻게 눈 감으셨을까 생각하면 정말 아쉽죠." 지난달 28일 전시장에서 만난 딸 김재도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인겸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100주년을 맞아 한국관이 건립된 해, 곽훈·윤형근·전수천 등과 함께 한국관 대표로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다. 당시 그는 한국관 내부 1, 2층으로 이어지는 원형 전시장을 작품의 요소로 끌어들여 건축적이고 장소 특정적인 그의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자칫하면 몇 장의 스틸 사진으로만 남을 뻔했지만, 작가는 자기 주머니를 털어 비디오 작가를 고용해 전시 현장을 찍었다. 영상은 당시 기술의 한계로 '홈 비디오' 수준의 화질로 남았지만, 한국 현대 미술사에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 담긴 귀한 자료다. 이번 전시엔 그의 1990년대 중요한 설치 작업 2점이 영상과 모형으로 소개된다. 대구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가 주목 받는 이유다.

'접기', 김인겸의 독특한 조형 방식

전시는 '접기'라는 독특한 조형 방식이 두드러지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딸 김씨는 "아버지가 1996년 퐁피두센터 초대로 파리로 건너간 이후 작품의 변화가 컸다"며 "그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여기 모았다"고 소개했다. '접힌 조각'과 평면 종이에 담은 '드로잉 조각'을 통해 조각의 기존 개념을 넘어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했던 작가를 드러내는데 주력했다는 뜻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스페이스-리스(Space-Less)' 연작이다. 이전에 청동 주조를 사용해 조립하는 방식으로 작업한 김인겸은 2007년 이후 평면성이 강조되는 입체 작품을 선보였다. 나아가 그는 종이 위에도 조각의 개념을 실현했다. 고무 패킹이 달린 밀대(스퀴즈)에 먹과 잉크를 묻혀 종이 위에 여러 차례 밀어냄으로써 자국을 남기는 작업이 그것이다. 스퀴즈 작업은 마치 투명한 실크 천이 겹쳐 있는 듯한 이미지로 보는 사람에게 각 면 사이의 공간을 느끼게 한다.

김씨는 "아버지가 파리에서 작업하며 종이를 접어 새로운 조형 언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며 "스퀴즈를 이용해 종이 위에 환영적인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각의 개념을 확장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맑고 투명한 면이 겹치며 만들어내는 선과 면을 통해 공간 만들기에 몰두한 김인겸은 이 작업을 '데생 조각'이라 불렀다.

평면과 입체 경계 허물기

전시는 1990년대 말 등장하기 시작한 '빈 공간(Emptiness)' 연작도 함께 소개한다. 바닥에 설치된 5개 보트 모양의 2004년 작 '빈 공간'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 갔을 때 각 입체가 전하는 공간감이 크게 달라진다. 바깥 표면은 스테인리스 스틸이지만, 작품 안쪽 표면은 빛을 모두 흡수하는 블랙 미러로 마감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을 들여다보는 듯 아득한 느낌을 준다. 한편 전시장 벽에는 종이 접듯이 철판을 접은 조각들이 '그림'처럼 걸렸다. 입체와 평면을 넘나들며 둘의 구분을 무색하게 하는 김인겸 특유의 작업이다.

그에게 '접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1997년 파리 퐁피두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그는 작가 노트에 "요즘 나는 물감도 접고, 종이도 접고, 철판도 접는다. 그리고 공간을 만든다. 빈 공간을, 마음도 한쯤 접어놓고 텅 비어진 기분"이라고 썼다.

녹슨 철판의 방, 그리고 촛불

특히 1992년 작 '프로젝트-사고의 벽(The Walls of Thought)'은 미술관 안에 녹슨 철판을 이용해 여러 개 방으로 공간을 구성한 대규모 작업이다. 33년 전 당시 5톤 트럭 여덟 대 분량의 철판이 사용됐다. 김씨는 "'사고의 벽'은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작업이었다"며 "비어 있는 각 방에 벽감(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공간)을 만들어 초를 켜 놓았던 구조물은 명상 공간을 닮았다"고 전했다. 김씨는 "'프로젝트-사고의 벽'은 현재 녹슨 철판 일부만 남아 있다. 굉장히 어려운 도전인 줄 알지만, 언젠가 큰 전시 공간에서 이 작품을 꼭 재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아들 김산 씨는 "아버지는 집에서도 항상 일거리를 앞에 놓고 어머니와 저희 남매에게 의견을 물으며 얘기 나누셨다"며 "조각의 경계 너머를 향한 아버지의 예술 여정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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