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은 기질적인 것부터 사회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느끼는 다양한 불일치와 피로와 고통을 바라보는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며 인간에 대해, 마음에 대해, 사회에 대해 생각했다. 많은 일이 일어났던 지난 2주간, 더 많이 생각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릴 때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고 공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같은 기전으로 근대사를 돌이켜보면, 한국은 식민지배와 전쟁 이후 효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 지금까지 달려왔다. 가난과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와 생산성, 효율은 꼭 필요했을 것이며, 우리가 윗세대들의 고생과 노력으로 풍요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이 효율 추구가 불가피한 선택인 동시에, 상실과 고통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한 안쓰러운 방어기제로 느껴진다. 식민지배, 전쟁, 독재상황을 거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을 잃어버렸다. 열강과 강자들에 의해 가진 것을 잃고 서로 반목할 수밖에 없었던 상처는, 가난하고 못난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미워하는 자기혐오로 발전했다. 또 한 가지 잃어버린 것은 서로 믿고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공동체와, 그 기반이 되는 사회적 신뢰다. 서로 믿고 사랑하고 나눌 수 있던 공동체는 폭력과 분열 속에 부서져버렸다. 캐시 박 홍 작가의 표현처럼 “성찰할 시간도 없고 성찰을 허락받지도 못한” 우리는, 괴로워 차마 돌아볼 수 없는 과거와 상실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더욱더 정신없이 일에 매달려온 것은 아닐까. 다시 약하고 못나서 침해받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어 무조건 강함을 추구하고 약자를 혐오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정말, 그렇게 지우고만 싶었던 상실과 상처야말로 우리가 당시 상처에서 제대로 회복하기 위해, 애초부터 들여다보아야 했던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서야 진심으로 든다.
젊은이들은 진료실에서 말한다.
“나는 안전한 공간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요.”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나는 친구를 만들고,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요.”
그들의 열망은 단순하다. ‘내가 이대로도 괜찮다’는 확신. 우리가 놓쳐온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많은 폭력과 결핍 속에서, 자기 자신도 공동체도 전혀 괜찮지 않았던 세월을 헤쳐온 윗세대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고통과 노력이, 우리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데려다주었기 때문이다.
지난주 광장에서 많은 깃발을 보았다. 오래된 깃발, 비장한 깃발, 귀여운 깃발, 무지개 깃발… 자신이 추구하는 것, 소중히 여기는 것, 재미있어 하는 것, 힘든 것을 그린 깃발이 어우러진 풍경은 생경하면서 아름다웠다.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안전하게 연결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그 마음을 “친구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라고 호명하고 싶다. 그 시작은 호기심이면 좋겠다.
어떤 깃발의 연원을 궁금해하듯이 서로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했나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은 그저 나로써, 초라하고 약한 나로서도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안전하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공화국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