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4·19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 교육에 헌신해서 국민을 자각하게 한 덕분에 가능했다.” 자기도취자들의 계보일까.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12월3일 이후 한 말 중에서 “(내가) 국회를 봉쇄하지 않아서 계엄 해제가 가능했다”는 말이 가장 인상 깊었다. 4·19도 계엄 해제도 자신들의 치적이라는 논리다.
세상 모든 힘이 자신에게만 있고, 따라서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이러한 확신은 어떻게 해체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변화가 가능한가 아니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인간도 있는가라는 ‘교정학적(矯正學的)’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와 이후 12·12 담화문, 탄핵소추안 가결 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일련의 행동을 보고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도대체 왜? 왜? 왜?”를 질문하다가 “취했나 봄”을 거쳐,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나는 “윤석열은 정상이다. 우리가 미칠 지경이지…”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근대 사회는 합리성이 지배한다는 신화로 작동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나 정치 지도자에 대해 의문을 갖고 연구한다. <히틀러의 정신분석> <부시의 정신분석> <박정희의 정신분석> 같은 책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특별하지 않다. 전형적인 자기 확신범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윤석열’ 같은 사람을 보면 의문에 시달린다. 미친 사람인가, 아픈 사람인가, 단지 나쁜 사람인가? 이에 대한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나쁜 사람이다. 나쁜 행동을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모든 폭력 가해자에 대한 심리 분석에서 전문가들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들은 한다. 왜냐면 할 수 있으므로(They do. Because, They can).”
문제는 그들이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이다. 윤석열의 욕구와 망상의 배경은 지도자로서 경험 없음과 일부 열혈 지지자들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지금 인간 윤석열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나는 초기 사태 즈음에는 칼 구스타프 융의 우아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봐야 시야가 트인다. 밖을 보는 사람은 꿈을 꾸지만,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깨어난다.” 깨어난다? 그가 자기 안을 보고 깨어날까. 하지만 그가 스스로 안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불가능한 것 같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이라는 선출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자기 내부의 문제를 밖으로 투사한 행위는 개인의 꿈으로 끝나지 않고 전 국민에게는 악몽이 되었고 전 세계의 우려와 비웃음을 샀다.
인간이 변하는 경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통받을 때이고 또 하나는 상대방이 평상시와는 다른 태도(리액션)를 취할 때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사랑하는 집사람’과 같이 수감되는 등의 고통이나 지지자가 등을 돌릴 때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은 왜일까. 역대 가장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부부 대통령, “윤건희”라고 불렸던 김건희씨를 “집사람”이라고 칭할 만큼 평범한(?) 그는 반성할까. 아니, 그의 반성을 기대하는 나의 심리는 무엇일까.
성찰은 끊임없는 재귀의 과정
거울이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기 전까지 인간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은 고요한 물이었다. 물이 찰랑이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고, 거울이 깨져도 마찬가지다. 파경(破鏡)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파경은 인간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을 직면하지 못할 때에도 등장한다. 깨진 거울로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거울이 깨지거나 깨는 행위는 상징적이다.
스스로 거울을 깨서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직면의 첫 단계다. 거울을 보기에 앞서 거울에 다가가는 것, 깨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이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면, 남들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이는 새로운 인식론을 필요로 한다. 이를 성찰(省察)이라고 해두자.
영어 표현과 한국어 사이에 간극이 큰 단어 중 하나가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성찰은 ‘반성한다’는 어감이 큰 데다 너무 자주 쓰이는 것 같다. 영어에서는 뜻이 비교적 명확하다. 재귀(再歸, reflexive)를 의미한다. 자기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반성이 아니다. 자신을 객관화(대상화)할 수 있는 힘, 자기 존중감이 필요하다. 자신에게로 끊임없이 되돌아옴, 재귀와 유착(流着)의 연속을 말한다. 재귀가 반복될 때 우리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상태를 산다. 즉 삶에는 항상적인 상태가 없다(無常). 언제나 갱신 중이라는 얘기다.
지금 상황에서 윤석열의 망상으로 인한 국민의 고통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그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국회, 선관위, 의료계 등이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대신, 한순간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 사회에는 윤 대통령 또래 남성들의 하위문화가 있다. 일종의 무의식적 궁금증이라고 생각하는데, 술을 마시면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소리를 지르며 타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주사의 일종이 그것이다. “알아!”가 아니라 “아십니까? 제발 알려주세요”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도 궁금하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에게 공포감을 조성해가며 물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때 자신이 할 말과 안 할 말, 할 행동과 안 할 행동이 분간될 것이다. 나는 윤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가 분별력 없음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상황에 맞지 않는 모든 판단과 언행이 나왔고, 그의 어리석음은 충격과 더불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12월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때도 그는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그가 무서워진다. 끝까지 자기로부터 도망가는 인간.
일상의 회복이 아니라 재발견
14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말 중에서 진부하지 않은 언어가 하나 있었다. “여의도 안의 싸움이 현장의 충돌로 확장될 것.” 투쟁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역시 투쟁의 연속이라는 뜻이리라.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끝나는 투쟁은 없다.
많은 이들의 지적대로, 이번 탄핵정국에서 시민들의 행동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민중가요 대신 ‘K팝’이 불리고, 20대 여성이 전체 참여자 중 19%에 육박했으며, 시민들의 깃발은 다양했다. ‘(서울지하철) 6호선을타는사람들의모임’ ‘고양이발바닥연구회’ ‘아무것도하기싫은사람들의모임’ ‘페미니스트 평화정치학 연구회-전국나쁜사람퇴치연맹’….
이 중 ‘전국나쁜사람퇴치연맹’이 눈길을 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윤건희’ 같은 이들이 많다. 이런 단체를 운영하려면,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고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부터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타인을 비판하려면 자기부터 되돌아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탄핵 와중에 대통령과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는, 이 모든 사태가 민주당의 폭주 때문이라며 비난했다. 귀담아들을 소리는 아니지만, 민주당에 대한 염려가 없는 국민도 없을 것이다. 민주당 역시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니체의 첫 저작인 <선과 악을 넘어서>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는 우리 모두를 위한 진실이다.
민주당이 국민들의 투쟁에 무임 승차했다는 비판을 피하려면, 민주당은 자신들이 거대 양당 정치의 최대 수혜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안 된다. ‘촛불’, 아니 ‘응원봉’은 양당 정치가, 대의제를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로 인해 직접 민주주의와 팬덤 정치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지역구 중심의 선거 제도부터 폐지해야 한다.
윤건희씨, 야당, 전국나쁜사람퇴치연맹이 말하는 일상의 윤석열들…. 이들 모두가 자신과 마주할 때 민주주의의 전진이 있다. 민주주의는 일상의 회복이 아니라 자신과 만나는 일상의 재발견으로부터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