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시한 20초 전

2025-03-06

딱 4분이 남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빈손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스물다섯의 류현진(한화 이글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기다리는 부모의 입술만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LA 다저스도 3분을 더 버텼다. 남은 시간은 이제 1분.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다저스는 결국 ‘구단이 원하면 선수 동의 없이 마이너리그에 보낼 수 있다’는 조항을 삭제했다. 류현진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오케이.”

다저스가 내민 계약서에 류현진의 대리인 스콧 보라스가 사인한 시간은 2012년 12월 9일 오후 1시59분40초(현지시각). 포스팅 계약 마감 시한이 불과 20초 남은 순간이었다. 한국 최고 투수는 메이저리그(MLB) 명문 구단을 상대로도 주눅 들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버텨 원하는 걸 얻어냈다.

처음 분위기는 좋았다. 류현진 독점 협상권을 따낸 다저스는 첫 미팅 때 등 번호 ‘99’와 ‘류(RYU)’가 새겨진 유니폼을 선물했다. 그 환대에 류현진도 마음을 열었다. 그런데 정작 계약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 달에 걸친 줄다리기 끝에 다저스가 내놓은 최종 계약안은 6년 총액 3000만 달러였다.

보라스가 의사를 묻자 류현진은 고개를 저었다. 금액보다는 ‘6년’이라는 장기 계약이 달갑지 않았던 거다. 더 충격적인 건 다저스가 갑자기 꺼내 든 ‘마이너리그 옵션’이었다. 그는 한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MLB에서 정말로 뛰고 싶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계약할 순 없다. 어떤 결정을 하든 이해해달라”고 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양 측이 조금씩 양보해야 했다. 류현진이 계약 기간 6년을 받아들이자 다저스는 보장 총액을 3600만 달러로 올렸다. 매 시즌 인센티브를 더해 최대 수령액을 4200만 달러까지 늘렸다. 그래도 마지막 한 발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이너리그 옵션을 놓고 끝까지 줄다리기했다. MLB가 KBO리그 출신 선수에 확신을 갖지 못하던 시절. 다저스 입장에선 마지막 안전장치로 내민 협상 카드였는데, 끝내 류현진이 이겼다.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잡히지 않고, 실리를 챙겼다.

그 후의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류현진은 첫 시즌 14승을 올려 다저스의 주축 투수로 자리 잡았다. 계약 마지막 해인 2019년엔 MLB 올스타전 선발투수로 나섰고, MLB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많은 KBO리그 출신 선수가 류현진이 낸 길을 따라 MLB 그라운드를 밟았다. 마감 시한 20초 전 극적으로 성사된 계약은 그렇게 양쪽에 ‘윈윈’이 됐다.

강압적인 ‘담판’ 외교로 국제 질서가 뒤흔들리는 요즘, 12년 전 한 야구 선수의 대담한 계약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실리와 명분, 상식과 균형, 소통과 합의가 양립하는 진짜 ‘협상’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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