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덧, 저녁 6시만 되면 완연히 깜깜해진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창밖으로 줄지어 이동하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해가 훌쩍 다 지나가 버렸구나, 마음이 아쉽다. 진행하던 장기적인 수업을 하나, 둘 마무리하면서, 차분히 1년을 마무리하고 또 계획하면서 한 살 더 먹겠지.
그날은 말과 글 관련 특강을 위해 PPT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에게 이런 특강은 빤하다. 저서도 있고, 말 ‘잘’하는 법, 글 ‘잘’ 쓰는 법은 이미 정해져 있기에 청중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도록 안내해 주면 된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침묵이 유용할 때가 더 많고 상대방을 공감하고 배려하라. 글도 그러하다.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정확히 묘사하고 재미있고 재치 있는 단어를 넣어서 포인트를 주어라. 그런데 무언가 모르게 이상하고 석연찮다. 이게 아니란 말이야.
한참을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기에 노트북을 덮고 마라탕을 먹으러 갔다. 탄수화물을 보충해서 뇌를 새롭게 순환시키기 위해서. 매콤하고 쌉싸름한 국물 한 스푼이면 온몸에 긍정 회로 센서가 작동한다, 요즘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는 나의 글쓰기 비법 중 하나이다. 양심상 채소를 잔뜩 넣고 맵기는 2.5단계로 주문한 후 구석에 혼자 자리 잡았다.
스마트폰 액정에 비친 얼굴을 한 번 점검하고 시선을 앞에 두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친구가 마주 앉아 마라탕을 먹고 있었다. 처음엔 ‘한 그릇에 만오천 원을 훌쩍 넘는데, 요즘 초등학생은 참 부자네’라는 생각을 했다가 또 무언가 이상했다. 앞서 이상한 기분과 이어지는 요상한 기분이었다. 한 친구는 숟가락을 움직여 국물을 떠먹고 마주 앉은 친구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먹는다. 귀는 막혀있고 눈은 스마트폰에, 손은 숟가락을 들고 움직인다. 마주 앉은 친구의 비스듬한 이마를 보면서 먹으면 같이 먹는 건가, 아닌가. 요상한 기분은 헐거운 외로움으로 이어졌다. 둘 사이에 말이 없다. 말이 사라졌다. 대화가 없어져 버렸다.
나 역시 그러했다.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고 밥은 대부분 혼자 먹는다. 혼밥이 익숙해지면서 말없이 먹는 밥이 오히려 좋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워낙 먹는 속도가 느리고 아침, 점심, 저녁 시간에 맞추어 먹는 게 귀찮다. 편식이 심해 잔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라 나와 맞는 밥 친구를 찾기 어려우니 혼자 적당히 아무 때나 대충 먹고 싶다. 아무 말 안 하고 아무 소리 안 듣고.
글이 사라지고 있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제품 설명서를 꼼꼼히 읽는 것보다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는 게 훨씬 쉽고 편리하다. 영상의 자막은 말인지 글인지 모호하며 긴 전달 사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발생한 오해가 비일비재하다. 책 읽을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나.
GPT가 자료도 찾아주고 잘 정리해서 대령해 주는데 굳이 직접 글을 써야 하냐는 질문에 사유와 마음 돌봄을 설명해도, 나의 대답이 옳은지 다시 GPT에게 물어볼 기세다. 예전엔 말인지 글인지 헷갈리는 짧은 텍스트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ㅋㅋㅋ가, 감정을 과하게 표현해 주는 이모티콘이 문제라 생각했는데, 이젠 많이 읽고 직접 쓰며 살자고 제안하는 내가 문제인 거 같다.
AI에 맞춰서 말과 글은 달라지고 있다. 굳이 직접 말하고 직접 쓰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는 스마트한 비서를 현명하게 이용하고 있을 테고 누군가는 의지하고 있을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이용당하고 있을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세상에서 나는 가끔, 내 직업이 ‘고객’인가 생각한다. 글만 쓰는 작가란 직업으로 아무런 힘이 없지만, 살아 있는 한 어디를 가도 소비는 하니까.
카드 내역서를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이젠 마음을 전달하는 카톡 선물, 생필품을 추천해 주는 알고리즘, 생일을 가장 먼저 축하해주는 대기업, 내가 고객일 때가 정상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 소비 자체가 삶의 의미인가 싶다. 내 마음 따위 몰라도, 글 같은 건 직접 쓰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소비만 할 수 있다면, 비싸게 파는 물건을 살 수 있는 VIP 고객이 될 수 있으면 잘 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올해가 가기 전 질문해 봅니다. 고객님, 당신의 마음을 사겠습니다. 팔겠습니까?
김현주 울산 청년 작가 커뮤니티 W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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