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국을 향한 심리적 의존은 유전인가. 트럼프가 다시 등장했다. 정치·경제·군사·안보 측면에서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면, 미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자다. 이에 세계 각국 정부는 물론 기업들도 선거 운동 기간 트럼프의 공약과 윤곽이 드러나는 차기 행정부의 인선을 분석하느라 분주하다. 이에 질세라 우리 윤석열 정부도 향후 트럼프 대통령과의 ‘골프 외교’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듯하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골프를 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새로운 차원의 발상이자, 놀라운 접근이다. 정상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지난 3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어린이정원 야구장에서 열린 어린이 야구교실에서 직접 타격해 보고 있다. 골프외교를 천명한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의 스윙이 남달라 보인다(출처-<한겨레>)
심리적 의존
며칠 전, 대학원생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좋다고 평가받는 학교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다. 이들에게 2가지 질문을 던졌다. 하나는 "유럽의 정책 결정자들은 트럼프의 재등장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을까"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트럼프의 재등장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을까"다. 이에 대해 학생들의 답변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전자에 대해 유럽엔 어렵겠지만 ‘기회의 창’이 될 수도 있다고 답한 반면, 후자는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적 상황을 고려하면 한국이 제시할 수 있는 특별한 전략과 대응책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각각의 답변이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화를 이어가면서 문득 2006년 12월 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50차 상임위원회에서 한 연설이 떠올랐다. 이 연설은 대중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주한미군 2사단을 한강 이북에서 이남으로 재배치하는 데 참여정부가 합의한 것을 두고 여러 공격이 이어지자, 이에 대해 대통령이 입장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당시는 대통령 집권 말기로 조·중·동은 물론 중도 또는 진보적으로 분류되던 한국일보·경향신문·한겨레 신문들도 참여정부를 향해 비판 일색이었고,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에 연설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주한미군 재배치를 선택하면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는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연설 링크).
2017년 12월 11일, 손석희 앵커가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 연설을 브리핑하고 있다(출처-
인계철선이란 말 자체가 염치가 없지 않냐? 남의 나라 군대를 가지고 왜 인계철선으로 써야 하냐? (중략) 미국이 호주머니 손 넣고 그러면 "우리 군대 뺍니다." 이렇게 나올 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미국하고 당당하게 "그러지 마십시오" 하든지, "예 빼십시오" 하든지 말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난 나가요" 하면 다 까무러지는 판인데, 대통령 혼자서 어떻게 미국하고 대등한 대결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완전하게 대등한 외교는 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초강대국입니다. 그런 헛소리는 하면 안 되고 미국의 힘에 상응하는 미국의 영향력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 줘야 합니다. (중략)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이것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주 국가 독립 국가로서의 체면은 유지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때때로 한 번씩 배짱이라도 내볼 수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위 연설 내용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하고자 했던 외교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는 해주되, 우리도 최소한 자주독립 국가에 걸맞은 외교를 하자는 것이다.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주한미군 2사단을 재배치 한 이유로 미국을 향한 우리의 ‘심리적 의존상태’를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의 등장이 유럽엔 기회의 창이 될 수도 있지만, 한국엔 특별한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학생들을 보면 이 심리적 의존 상태가 여전히 젊은 세대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유럽엔 기회?
지난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유럽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나토(NATO)를 두고 트럼프는 유럽이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취임 직후부터 비판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였던 메르켈과 트럼프의 관계는 냉랭했던 유럽과 미국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2020년 6월, 트럼프 대통령이 독일과 사전 협의도 없이 주독 미군을 감축한다고 발표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의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메르켈은 트럼프를 향해 ‘미군의 독일 주둔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의 이익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미국이 스스로 글로벌 리더십을 포기하려 한다면 유럽은 그에 맞는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2018년 6월, 캐나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메르켈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하는 모습. 당시 독일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 미국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출처-<연합뉴스>).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의 재등장은 오랫동안 유럽 차원의 군대를 보유하려 했던 유럽에 기회가 될 가능성도 있다. 비록 프랑스의 비준 실패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실제 유럽은 1954년 유럽군대 창설을 골자로 한 유럽방위공동체(European Defence Community)를 추진했다. 유럽방위공동체 무산 이후 유럽은 미국과의 나토를 통해 안보 문제를 해결하고, 주로 경제협력에 매진해 지금의 유럽연합을 만들었다. 유럽연합은 오랜 시간 경제·사회·정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통합을 이끌어냈으나, 여전히 경제력에 비해 미미한 군사력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1990년대 발칸 지역에서 심각한 내전을 발생했을 때도 유럽연합은 어떠한 영향력도 보이지 못하고 결국 미국에 손을 내밀어야 했다.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큰 맥락에서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재등장한 트럼프가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에 지나치게 높은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거나 협상에서 미국이 나토에서 빠지겠다고 할 경우, 유럽이 마냥 미국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지난 10월 30일, 유럽연합 고위 관료들을 인터뷰한 폴리티코 기사는 유럽연합 내부적으로 해리스가 아닌 트럼프의 당선을 내심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이러한 요구가 비록 처음에는 입에 쓴 약처럼 쉽진 않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럽연합의 미래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즉, 트럼프의 재등장이 경제는 물론 안보적 측면에서 이제 유럽연합이 미국에 기대기보다 독자적인 영향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관련 폴리티코 기사 링크).
그럼 한국은?
그럼 한국은 어떠할까? 일단 현재 대통령실은 골프외교 외에는 어떠한 대책도 없어 보인다. SBS 15일 자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외교·안보 인선을 두고 "누가 되든 한국을 애정이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 인사들이)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누구나 공감하고 있어 앞으로 적절한 계기에 한미동맹이 주요 현안에서 어떤 비전과 방향성을 갖고 협력을 도모할지 협의를 지속해 나가겠다"고 전했다(관련 기사 링크).
이처럼 대통령실의 한가한 바람과 달리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한국이 마주할 위기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지난 18일, 세종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 <미국 트럼프 2 기 행정부: 국내 정치 지형 변화와 대외정책 전망>에 따르면, 향후 한국 정부가 마주할 위기 요인으로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 한미동맹과 대북정책의 관점에서 미국은 한국에게 방위비 분담 증액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 한미 경제통상관계의 관점에서 미국은 한국이 무역흑자를 보고 있는 한미 FTA 추가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 미국의 대중국 포위외교의 관점에서 미국은 한국의 동참을 강력하게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11월 5일(현지시간) 진행된 미국 대선 결과
(출처-
한국 정부 입장에서 이 3가지 중에서 어느 것 하나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 더해 2기 트럼프 행정부는 1기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대선에서 압승(선거인단: 트럼프 312석 vs. 해리스 226석)한 데다가 상·하원에서도 다수당이 되었다. 향후 트럼프 행정부는 고위직 인선은 물론 예산지원에서도 어려움이 없다. 이러한 여건과 트럼프의 지난 행적을 고려하면, 한국 정부를 향해 공세적인 외교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와 함께 ‘심리적 의존상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협상 시작도 하기 전에 심리적 의존상태를 버리지 않을 경우,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외교는 불 보듯 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위의 메르켈 총리와같이 필요한 말을 하는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또한, 트럼프의 재등장 이후 국내에서 여러 보고서와 언론의 분석기사를 확인했으나, 위에서 제시한 폴리티코와 같은 주장은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트럼프의 특징을 분석한 다음, ‘잘 대처해야 한다’ 정도가 정책적 제언이었다. 특히, 안보 관련 분야에서는 ‘우려’가 주를 이루었다. 그 우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던 그 ‘심리적 의존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들이다.
이제는 심리적 의존상태를 벗어나자
처음에 던진 질문, "미국을 향한 심리적 의존은 유전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자. 기성 언론과 기성세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적한 미국에 대한 심리적 의존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들 또한 그러한 심리적 의존상태를 고스란히 보이는 것은 매우 아쉬웠다. 왜냐하면 트럼프의 재등장이 지금 2년 동안 전쟁을 겪고 있는 유럽에는 ‘기회의 창’이라고 말하면서, 비록 정전이라고는 하지만 전쟁을 겪지 않은 한국에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트럼프가 북한의 위협을 근거로 한국과의 협상에서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을 요구할 경우,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분명하게 인정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완전하게 대등한 외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이 지나친 요구를 할 때, 최소한 자주독립 국가로서 한 번씩 배짱이라고 내볼 수 있어야 한다. 미국에 대한 심리적 의존상태에 빠져 있을 경우, 이 배짱이 곧 국가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협상장에서 이런 배짱조차도 없으면 그저 상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줘야 하는 호구가 될 수밖에 없다.
지난 18일 박진 전 외교부 장관의 워싱턴에 위치한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열린 한·미 전략 포럼에서 밝힌 것처럼, 한국은 더 이상 의존만 하는 작은 국가가 아니다. 박 전 장관은 이 포럼에서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자 9위의 유엔 분담금 납부국인 동시에 8대 방산 수출국이자 7대 우주 기술력을 갖춘 민주주의 국가"이며, "1인당 국민소득(GNI)이 일본을 넘어선 번영의 경험을 개발도상국에 전수할 준비가 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한국은 이런 국가다. 이제 심리적 의존상태를 벗어나 최소한의 자주 독립 국가의 모습은 보여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