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들레이드의 랜드 마크가 뭐죠? 오페라 하우스처럼 누구나 알 법한 건물이나 상징물이요.”
호주는 여러 번 가봤지만 애들레이드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현지인을 만날 때마다 물었으나 한 번도 뾰족한 답을 듣지 못했다. 며칠 지내보고 알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벽한 날씨, 풍족한 녹지와 다채로운 먹거리(특히 와인!)를 자랑하는 도시는 구태여 랜드 마크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세계 3대 공연 축제로 꼽히는 ‘프린지 페스티벌’ 기간에 애들레이드를 방문했다. 이어 호주 최대 도시로 이동해 시드니에서만 할 수 있는 아찔한 체험을 해봤다.
도심 감싼 공원서 열린 축제
애들레이드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의 주도다. 한국보다 9배 넓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182만명. 이 중 약 140만명이 애들레이드에 산다. 애들레이드 도심은 도넛처럼 생겼다. 고층빌딩 즐비한 시가지를 널찍한 공원이 에워싼 형태다. 영국 윌리엄 라이트 대령이 1836년에 애들레이드를 식민화하면서 공원 도시를 디자인했다.

이달 23일까지 약 한 달간 이어지는 프린지의 주 무대도 공원 구역이다. 낮에는 어린이도 볼 만한 공연이 열리고, 저녁에는 제법 수위가 높은 성인용 공연이 펼쳐진다. 올해는 1432개 쇼가 무대에 오른다.

축제 개막 이틀째인 2월 22일 오후 리밀 공원, 글루터니(Gluttony) 구역을 찾았다. 해가 기우니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애들레이드 시민이 다 집결한 듯했다. 먼저 올드 팝을 부르는 4인조 그룹 ‘더 식스티 포’의 공연을 봤다. 호주판 ‘미스터 트롯’ 같았다. 퀸, 엘튼 존 등 익숙한 팝 스타의 노래가 나오자 떼창에 동참했다. 두 번째 공연은 춤과 노래, 서커스가 결합한 ‘프라이멀’. 처음엔 배우들의 과감한 복장 때문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했는데 차력 쇼처럼 아찔한 장면이 많아 1시간이 쏜살처럼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 축제장을 다시 찾았다. 난장이 다름없던 공원은 고요한 초록 낙원이었다. 식물원에서는 미국 유리공예가 데일 치훌리의 특별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식물원은 정갈한 영국식 정원과 우람한 열대 식물이 공존하는 신비한 세상이었다. 치훌리의 작품을 감상하다가 멸종 위기종인 회색머리날여우박쥐 떼도 만났다.
달리 작품 전시한 와이너리

프린지는 공연만 보는 축제가 아니다. 먹고 마시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난해 유료 공연 티켓이 약 90만장 팔렸는데, 축제 방문객이 230만명이 넘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올해는 리밀 공원에만 32개 식당, 15개 바가 들어섰다. 소문난 지역 맛집 ‘루네(Lune)’의 팝업 매장에서 고수 곁들인 소고기 타르타르, 홍합 스튜, 가리비구이를 먹었다. 풍미 그윽한 남호주산 와인과 궁합이 좋았다.


남호주는 호주 와인 생산량의 절반을 책임진다. 와이너리 투어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80여 개 농장이 밀집한 와인 산지 ‘맥라렌 베일(McLaren Vale)’이 도심에서 차로 40분 거리다.
유기농 와인과 예술 전시로 유명한 와이너리 ‘다렌버그(d’Arenberg)’를 가봤다. 큐브형 건물 안팎에 스페인 괴짜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25점과 기기묘묘한 미술품을 전시했다. 다렌버그에서는 와인 제조도 해볼 수 있다. 각기 다른 토양에서 생산한 와인 3종을 맛보고, 기호에 따라 섞어서 가져간다. 와이너리를 나와 애들레이드로 돌아가는 길, 포도밭을 질주하는 캥거루 네 마리를 봤다.

애들레이드 미식 체험에서 센트럴 마켓도 빼놓을 수 없다. 76개 점포가 들어선 165년 역사의 시장이다. 지역 음식과 식재료부터 한국, 중동, 이탈리아 등 세계의 맛이 집결해 있다. 관광 가이드 스테파니 테일러는 “한 끼 식사는 물론 과일, 고기도 대형 마트보다 저렴해 현지인도 즐겨 찾는다”고 말했다.
134m 아치 정상을 등반하다
비행기를 타고 시드니로 이동했다. 시드니는 안 가봤어도 가본 것처럼 익숙한 도시다. 애들레이드와 달리 세계적인 명소가 수두룩해서다. 그래서 시드니에서만 할 수 있는 이색 체험에 도전했다. 시드니의 랜드 마크로 꼽히는 ‘하버 브리지’를 걸어 오르는 브리지 클라이밍.

하버 브리지는 1932년 완공된 1149m 길이의 아치교다. 브리지 클라이밍도 제법 역사가 길다. 1998년 시작했다. 클라이밍 체험은 약 3시간. 준비 시간이 거의 절반이다. 건강 상태와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 각종 서류에 서명한 뒤 안전 교육을 받는다. 휴대전화를 비롯한 어떠한 소지품도 챙길 수 없고, 난간에 연결된 케이블에 몸을 의지한 채 걸어야 한다.


오전 10시, 12명이 조를 이뤄 등반을 시작했다. 8차선 도로 아래쪽에 설치된 데크를 걸을 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 사다리를 붙잡고 오르며 교각을 지나자 비로소 시야가 트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바로 옆으로 전철이 쌩 지날 때는 심장이 철렁했다. 걷다 쉬기를 반복하면서 해발 134m 높이 아치 정상에 도착했다. 오페라 하우스와 마천루, 항구를 바쁘게 드나드는 유람선. 그림엽서 같은 풍광이 펼쳐졌다.
1시간 30분 만에 다리에서 내려왔다. 오페라 하우스 쪽으로 이동했다. 아치를 오르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였다.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도 오금이 저릿했다.

시드니에서 이색 체험을 하나 더 했다. 노스 쇼어의 ‘베리 아일랜드 보호지역’에서 원주민을 만났다. 어머니가 벙줄라 족이라는 ‘키라 랜들’은 6만5000년 이상 고유한 문화를 일궈온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유럽 이주민이 원주민을 착취한 역사보다 숲에서 식량과 약재를 채취해 먹으며 자연과 밀착해 살던 그들이 질병과 설탕처럼 해로운 음식으로 고통받았다는 말이 더 슬펐다. 252개에 달했던 호주 대륙의 원주민 국가는 50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문자는 없었다. 오페라 하우스, 하버 브리지가 있는 지역은 모두 원주민의 생활 터전이자 만남의 장소였다.
여행정보

호주 애들레이드와 시드니를 함께 여행하고 싶다면 항공 노선을 잘 공략해야 한다. 이번에는 싱가포르항공을 타고 싱가포르를 경유해 애들레이드로 간 뒤 시드니를 들렀다가 돌아왔다. 서울~싱가포르 6시간, 싱가포르~애들레이드 6시간 30분, 애들레이드~시드니 1시간 50분. 하버 브리지 등반은 시간대에 따라 요금이 다르다. 350호주달러(약 32만원) 선이다. 원주민 문화 체험은 현지 여행사 ‘스플렌더(Splendour Tailored Tours)’에서 예약할 수 있다. 호주를 가려면 인터넷 비자(20호주달러)를 받아야 한다. 자세한 정보는 호주관광청 홈페이지 참고.
애들레이드·시드니(호주)=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