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1년(공민왕 20) 봄, 나주호장 정침은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있었다.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의 행정을 맡아 보던 향리 중 가장 높은 직급이다. 제주로 가던 그 바닷길, 하필 왜구를 만나고 말았다. 중과부적이라며 다들 항복할 궁리만 하던 때, 정침은 극렬히 저항했다. 마침내 화살이 다 떨어져 버리자, 정침은 관복을 갖춰 입고 정좌했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몇년 후 이곳에 정도전이 유배를 왔다. 우왕을 즉위시킨 권신 이인임이 북원과 외교를 재개하는 것을 반대하다 쫓겨난 길이었다. 공민왕의 시해, 명 사신의 살해 등으로 이어진 껄끄러운 외교 난맥을 이인임은 북원과 통교하는 것으로 돌파하려 했다. 위험천만한 선택이었기에 많은 관료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이들 모두 파직되거나 유배됐으며, 변변찮은 집안 출신인 정도전만 근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떠돌았다. 그것도 30·40대 한창나이에. 이런 연유로 머물게 된 나주에서 정침의 이야기를 들은 정도전은 <정침전>이라는 글을 지었다.
나는 처음 정침 이야기를 읽었을 때 별 감흥이 없었다. 바른 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이런 인간형은 조선에서 너무나도 정형화된 위인상이었기 때문이다. 유학자 정도전이 쓴, 흔하디흔한 위인전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변한 것은 이 시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였다. 고려 말에는 정침 이야기가 전혀 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이 왜구로 몸살을 앓는 이 시대에, 사람들은 적당히 자기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에는 배울 만치 배웠다는 사람들까지 왜구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기강이 해이해진 것은 왜구를 잡으라고 보낸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근처에 진이나 치고선 대충 시간만 보내곤 했다. 윗물이 흐리멍텅하니 아랫물까지 흐리멍텅한 시대였다.
정침에 대한 나주 사람들 평도 그냥 그랬다. 가만있었으면 살았을 것을 괜히 빠져 죽었다고, 어리석었다고 숙덕댔다. 정도전은 이 지점에 분노했다. ‘죽고 사는 게 아무리 큰일이라고는 하나, 의리와 명예를 더 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다 이렇게 의로운 일을 하진 못하더라도 이 일이 명예롭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이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주지도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 없다면, 사람의 도리는 벌써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른 일을 했는데도 사람들이 알아주기는커녕 비웃기나 하는 세상이라면, 그 혼란은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정도전은 의분을 가득 담아 이 사람의 이야기를 꾹꾹 눌러 썼다.
유학자 정도전에게, 그리고 20여년 후 세워질 새 나라 조선에서 ‘의리’는 조직폭력배처럼 우두머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었다. ‘의리’란 사람이 추구해야 할 올바른 가치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가치를 이해하는 떳떳한 천성을 가졌다고 여겨졌다. 세종은 모든 사람이 가진 바르고 떳떳한 마음이 제대로 발휘되게 하는 것이 위정자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이 고민은 <삼강행실도>로, 또 거기에 멈추지 않고 훈민정음의 창제로 이어졌다.
200년이 지나, 전 국토가 왜적의 침입 아래 놓였을 때 각지에서 의병과 의승군이 봉기했다. 또 300여년이 지나,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의병이 일어났고, 결국 식민지가 되었음에도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저 옳은 일이기에 성패와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나서는 이러한 인간형은, 비록 모두에게 바르고 떳떳한 천성이 내재해 있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전한 수많은 이들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지금 이 시대, 모두가 이야기를 만든다. 어떤 이야기를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르는지는 그 만들기의 한 방편이다. 당신은 어떠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