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 [조남대의 은퇴일기(55)]

2024-07-02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모토를 가진 정보기관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특히 전쟁에서는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정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싸움이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비극적인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일 것이다. 여기에서도 정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조기에 종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대 사회에서 정보는 다양한 영역에서 필수적인 자원이다. 정보나 첩보를 효율적으로 수집, 분석, 활용하는 것은 국가를 비롯하여 어느 조직에서나 생존과 직결될 수 있다. 우연한 기회에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통해 ‘앨런 튜링’(Alan Turing)이라는 인물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정보나 첩보에 관심이 많은 터라 관련 사항에 대해 눈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사 이래 가장 규모가 크고 잔인했던 전쟁으로 태국 인구보다 많은 7천5백만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연합군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력의 우위와 핵무기 사용과 함께 독일의 암호를 실시간으로 해독하여 전략적으로 대처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이런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천재 수학자이고 암호학자이면서 컴퓨터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앨런 튜링’을 필두로 독일의 암호를 풀기 위한 비밀조직을 꾸렸다.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는 그 경우의 수가 1만 7천 가지가 넘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와 같아 해독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을 풀지 못하란 법은 없다. 튜링은 ‘봄베’라는 암호해독 장치와 ‘콜로서스’라는 최초의 컴퓨터를 개발하여 24시간마다 바뀌는 독일군이 주고받는 암호를 해독했다. 이를 활용하여 선제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튜링의 암호해독으로 종전을 무려 2년이나 앞당겼으며, 매분 3명이 죽어가는 전쟁에서 1천4백만 명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손자병법에서도 적과 전투를 벌이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전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의 암울한 그림자 속에서 튜링의 업적은 마치 어둠 속의 등불처럼 인류에게 희망과 구원의 빛을 비추었다.

종전 후 튜링의 미래는 창창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그의 삶은 비참하게 변해갔다. 그는 동성애자였고. 당시 영국은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1952년 체포되어 재판 결과 10년 감옥 생활 또는 화학적 거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튜링은 연구를 위해 후자를 택했지만 깊은 절망에 빠졌다. 결국, 1954년 청산가리가 묻은 사과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41세다.

만약 당시 그의 업적이 알려졌다면 감형이나 선처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공훈은 군사기밀로 묶어 30년 동안이나 감추어져 있었다. 국가에 대해 배신감과 원망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독이 든 사과를 깨물었을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왜 수모를 좀 더 참고 견디지는 못했을까. 너무나 안타깝다. 나라면 견딜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오히려 자살할 용기조차 없어 정신이상이 되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영웅의 명성은 그렇게 묻혀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독이 묻은 사과를 먹고 최후를 마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후세에 제대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1974년 암호해독에 대한 사실 일부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튜링의 업적이 서서히 대중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별사면령은 튜링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공적을 인정하는 계기기 되었다. 영국 우체국은 ‘위대한 영국인 10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 또한, 그의 초상은 영국 지폐의 최 고액권인 50파운드 신권에 담겨 국민은 언제나 그를 곁에 두고 만날 수 있게 되었다. 2023년에는 ‘벤 월리스’ 영국 국방성 장관은 트라팔가르광장에 튜링 동상 건립 필요성을 제안하면서 “튜링은 2차 세계대전을 단축했고 수많은 생명을 구했으며, 나치를 무너뜨린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이다”고 극찬하였다.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를 위한 헌신이 잊히지 않고 합당한 평가와 대우를 받음으로써 저세상에서라도 그의 상처 입은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으리라.

이후 수많은 미디어는 앨런 튜링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영화는 관객들에게 큰 호평과 아카데미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상을 받아 튜링의 이야기를 더욱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연극 ‘튜링머신’은 프랑스에서만 700회 공연을 이어갔으며, 2022년부터는 미국에서도 무대에 오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인극 튜링머신 공연을 시작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암호해독 이야기는 흥미로울 뿐 아니라, 튜링의 극적인 삶의 요소들이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에도 성 소수자들의 권리와 차별, 편견 등은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이기도 하다. 튜링의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넘어 인간 존엄성에 대한 숭고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위대한 인물을 평가하면서, 그의 공과功過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함에도 한순간의 잘못만으로 모든 공적을 폄훼하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우매한 일인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도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할 것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 나폴레옹 군을 격파한 넬슨 제독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광장에 튜링의 동상이 세워진다는 것과 원스턴 처칠이 5파운드 지폐에 그려진 것에 비하면 그가 끼친 공적 무게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사후에야 제대로 평가받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영국 국민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도 뿌듯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독 사과를 깨물고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그의 최후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