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없이 '예쁜 보고서'만…공무원 무력감 크죠"

2025-02-04

10년 차 사무관 생활을 마치고 서기관으로 승진하자마자 ‘순환 보직’으로 부서 이동 지시가 떨어졌다. 저작권 분야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다는 일말의 기대가 무너지자 과감히 사표를 냈다. 퇴직한 서기관이 쓴 공직사회 르포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이 110만여 명의 공무원 사회를 달구고 있다. 출간 한 달 만에 4쇄를 찍었다.

최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노한동 작가는 “한 장짜리 보고서를 ‘예쁘게’ 만드는 게 공무원의 가장 큰 과제가 되고 있다”며 “사무관 한 명의 머리에서 나온 보고서가 토론 하나 없이 장관 결재까지 직행하는 것을 보면서 무기력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노 작가는 한글 파일에 폰트 크기 15의 글씨로 한눈에 들어오는 간결하고 명쾌한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복잡한 사안이라도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예쁜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고서 한 장에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담기도록 문제점과 원인, 해결 방안을 두세 가지의 맥락으로 단순화하는 게 우선된다”며 “정책이 작용해야 할 복잡한 현실을 해답을 낼 수 있는 선에서 의도적으로 평탄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직에 들어서 문화체육관광부에 자리잡은 후 처음 맡게 된 출판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의 독서율 하락 원인과 대책을 짚는 과정에서 해결 방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을 먼저 고민하고 그에 맞춰 원인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애초 토론과 협의를 기대하고 중앙부처 사무관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면접 때 요구받은 일방향 소통에 순응하는 인재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는 공직사회의 수많은 회의와 대기(온콜) 문화도 ‘가짜 노동’을 양산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봤다. 중앙부처에서 열리는 실·국장 회의 역시 늘 관례적으로 월요일 오전 9시에 열려 주말 내내 사무관들을 대기 상태에 시달리게 하지만 정작 주요 보고 사항은 다른 간부들이 없는 자리에서 독대 보고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실·국장 회의는 정작 차우선 순위에 있는 안건들이 논의된다는 게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행정고시를 치르며 공부했던 행정학이 그가 경험했던 국가 행정과 가장 큰 차이를 보였던 부분은 무엇일까. 노 작가는 “행정학에서는 특정한 사건을 통해 ‘정책의 창이 열린다’고 표현하는데 실제로 부처 생활을 해보면 정책의 창이 열렸을 때 근원적인 대책을 내놓기 어렵다”며 “창작자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구름빵’ 사건 때도 정작 창작자가 아닌 플랫폼과 제작사의 권리 향상을 위한 문화 산업 공정 유통 법안이라는 다른 대책을 내놓은 게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기존에 하던 것들에 추동력을 발휘하는 방식을 택하는 편이 새로운 대책을 만들어 예산을 확보하고 여러 장의 보고서를 만드는 것보다 ‘가성비’가 낫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공직사회에서 사무관의 엑소더스가 계속되는 이유로 쌓이는 무력감과 공무원의 권한·책임의 불일치를 꼽았다. 그는 “정부에서는 공무원의 연봉이 낮은 점을 엑소더스의 원인으로 보고 있지만 5급 사무관의 경우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비효율적인 노동 관행과 전문가가 될 수 없는 순환 보직으로 인해 무기력감이 공기처럼 쌓인다”고 진단했다.

그는 공직사회의 승진 제도에 대해서도 한마디 보탰다. “공직사회에서 승진의 기준은 ‘무엇을 얼마나 잘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얼마나 가까이서 보좌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실질적인 일을 하는 곳은 말(末)과로 취급받아 승진에서 밀리고 모든 사항을 취합하는 ‘호치키스 행정’을 하는 과는 일(一)과로 분류되는 관행이 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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