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일 논의하려고 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야당 간사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4일 이렇게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기습 비상계엄령 선포와 이에 따른 탄핵 정국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특별법 등 산업 지원 법안 논의가 가능한지 묻자 나온 답변이다. 김 의원은 “전력망 확충 특별법처럼 한 번도 논의 안 한 법안을 먼저 논의하고, 나머지 시간에 반도체 특별법 등을 논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탄핵안 표결이 있다보니까…”라며 논의가 어렵다고 전망했다. 윤 대통령 탄핵안 표결은 오는 6~7일 이뤄진다. 부결되더라도 탄핵 정국 여파는 한 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은 현 정치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어떻게 될 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반도체 특별법 처리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라고 토로했다. 반도체 특별법은 반도체 산업에 정부가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법안이다. 재정 지원에는 여야가 큰 이견이 없었지만, 여당이 주장하는 ‘주 52시간 적용 예외’(화이트칼라 이그젬션)에 대해 야당은 반대하며 근로기준법에서 따로 논의하자고 했다. 이 때문에 반도체 특별법은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한 상태다. 다만 반도체 산업의 시급성을 고려해 여야 지도부의 일괄 타결로 ‘주 52시간 적용 예외’ 조항은 빼고 12월 정기국회에서 법안을 처리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계엄령 사태로 이 가능성마저 사실상 사라졌다.
경제계 관계자는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기업에 엄청난 투자 인센티브를 주는데, 한국은 그게 없다보니 기업들이 인프라 투자를 하기 힘들다”라며 “특별법이 통과해도 실제 보조금 지급까진 시간이 걸릴 텐데 법안 통과마저 미뤄지면 첨단 산업 경쟁력이 그만큼 뒤로 밀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중국·일본·독일·이스라엘 등은 대규모 생산 기지를 자국에 유치하기 위해 기업에 보조금을 쏟아붓는 ‘국가 대항전’ 성격의 경쟁이 진행 중이다. 반도체과학법을 만들어 삼성·SK하이닉스·TSMC 공장을 유치한 미국 외에도, 중국은 역대 최대인 64조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기금을 조성해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 산업에 91조원을 지원하는 종합경제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은 보조금 지급 제도가 없고 국가전략기술 설비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만 있다.
문제는 이 세액공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투자세액 공제 일몰 기한은 올해 말까지였는데 여야는 2029년 말까지 연장하는 데 뜻을 모았다. 세액공제율도 현행보다 5%포인트 높이기로 했다. 그렇지만 정쟁으로 법안은 소관 상임위인 기획재정위원회를 넘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 탄핵 정국까지 더해지며 언제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미 내년 투자 계획을 짜야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확실성이 그대로이니 답답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 애로 호소한 '전력망 확충법'도 처리 요원
기업들이 처리를 요청했지만 산자위에 계류돼 있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방폐장) 특별법도 언제 논의가 재개될지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다. 전력망 확충 특별법은 대규모 전력을 쓰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산업 등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 전력망 확충시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인천 송도 바이오클러스터가 조성되고도 전력망이 구축되지 않아 공장을 못 돌리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기업이 전력망 문제로 애로를 겪자 산업계는 법안 처리를 요청해왔다. 류성원 한국경제인협회 산업혁신팀장은 “전력망 확충 특별법은 전력을 쓰는 모든 기업과 관련된 법안”이라며 “지금까지 전력망 확충이 늦어져 산업적으로 문제가 많았는데 국회 법안 처리까지 ‘올 스톱’ 상태라 기업들이 더 어려워지게 됐다”라고 말했다. 고준위 방폐장 설치 근거를 담은 방폐장 특별법은 원전의 지속적 운영과 전력 공급에 필수적인 법안이라고 산업계는 주장해왔다.
기업 관계 법안인 상법·자본시장법 개정안 논의도 ‘올 스톱’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상법상 현재 회사로 제한된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추진해왔다. 재계의 우려가 큰 법안으로, 여야 이견이 커 쟁점 법안으로 꼽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4일 오전 직접 좌장을 맡아 상법 개정안 공개 토론회를 열 계획이었지만 비상계엄 사태 이후 취소했다. 여당이 상법 개정 대신 제시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소액 주주 보호 강화 방안을 담고 있다. 상법 개정안과 맞물려 있는 법안인데, 이 역시 추가 논의는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