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자의 배우'설'(說)] 주지훈의 멋

2025-02-13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중증외상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보처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넷플릭스 시리즈 '중증외상센터'(감독 이도윤, 각본 최태강)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다. 드라마와 영화가 반드시 사회적 메시지를 환기할 필요는 없지만,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수반되어야 할 의료 시스템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1화에서부터 8화에 이르는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통해 정부에, 병원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래서 중증외상센터는 필요해"라고 말하는데 그 방식이 따분하지도, 느끼하지도 않다.

한 편의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을 때의 순기능 중 하나는 사회와 단체에 파장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유도한다.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함이든 아니든 의도는 중요치 않다. 대중, 의료인, 정치인까지 중증외상센터의 필요성과 지원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주제 의식을 설파한 화자이자, 메시지를 옮긴 전달자는 누구인가. 화자는 천재의사 백강혁, 전달자는 배우 주지훈이다. 이 속 시원한 일갈은 1화부터 차곡차곡 빌드업해 온 백강혁의 캐릭터에 의해 강력한 파급력을 획득한다.

백강혁이라는 캐릭터가 전에 없이 새롭다고 볼 수는 없다. 기시감이 든다. 실력은 최고지만, 성격은 까칠한 츤데레 캐릭터는 돌담병원('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에서 봤고, 드림즈('스토브리그'의 백승수)에서도 봤다. '중증외상센터'의 백강혁은 뭐가 달랐던 걸까. 주지훈이라는 필터를 거쳤다는 것이 가장 큰 차별점이다.

'중증외상센터'는 명백한 판타지다. 우리네 현실에는 백강혁이 없다. 이 드라마는 1화에서부터 백강혁의 판타지를 내세운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을 패러디한 듯한 장면이 등장한다. 블랙 가죽자켓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한 남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중동의 드넓은 대지를 질주한다. 인근 마을에는 포탄이 터지고, 이내 아비규환의 상황이 된다. 이 인물이 포탄, 미사일을 피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도한 곳은 병원이었다.

그의 이름은 백강혁, 중동과 아프리카 전장에서 남다른 의술로 사(死)의 나락까지 갔던 이들은 생(生)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의사다. 전장을 누비는 슈퍼 히어로 의사라니, 본 적도 없고 볼일도 없을 것 같은 영화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대한민국 최고의 종합병원에 부임해 일당백으로 중증외상환자를 치료하며 중증의료센터 건립에 이바지하는 정의로운 의사라니. 이 정도면 사기 캐릭터다.

과장과 극대화만 있었다면, 재미도 공감도 없는 허황 판타지에 그쳤을 것이다. '중증외상센터'에는 다양한 사례가 나온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에 의해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이를 고쳐내며 성장하는 의사들도 나온다. 실제 의사인 한산이가(이낙준) 작가가 쓴 원작 소설은 리얼리티가 살아있고, 최태강 작가가 쓴 각본은 적 재미를 강화했다.

백강혁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벽남이 아니다. 불합리한 위계와 관행에 저항하는 아웃사이더며, 오늘만 사는 다소 삐딱한 영웅이다. 주지훈의 반항아적 이미지와 퇴폐미는 백강혁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여기에 여유로움과 나른함 사이를 오가는 특유의 심드렁한 말투와 무심한 액션까지 더해져 웃음을 자아낸다.

만화적인 완벽함으로 인해 자칫 화이부실(華而不實)에 그칠 수 있는 캐릭터지만, 백강혁에게는 "사람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 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사고 프로세스는 이 신념에 기반해 움직인다. 강박하고 팍팍한 세상, 현생에 없을 것 같은 존경스러운 영웅 그리고 마음까지 가는 어른의 등장이다.

주지훈이 다시없을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거나, 인생 연기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18년의 배우 생활을 통해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은 필모그래피를 만들어냈다. 2003년 모델로 데뷔해 2007년 드라마 '궁'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군 제대 이후에는 배우로서 주목받는 이력을 추가해 나가기 시작했다. 영화 '좋은 친구들'(2014), '아수라'(2016), '암수살인'(2018)은 잘생긴 외모를 내세운 연기가 아닌 캐릭터의 매력, 연기의 개성으로 승부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를 통해 배우 인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또한 이 기간 '신과 함께'(2017) 시리즈로 천만 흥행의 성취를 경험했고, '킹덤'(2019) 시리즈를 통해 K콘텐츠 글로벌 신화의 신호탄을 쏘기도 했다.

'중증외상센터'는 주지훈이 오랜만에 1번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자신보다 10살 이상 어린 공동 주연 배우(추영우, 하영)들을 이끌며 스타성을 폭발시켰고, 현장의 리더로서의 역량까지 보여줬다. 또한 영화 '좋은 친구들'에서 절묘한 호흡을 보여줬던 이도윤 감독의 드라마 연출 데뷔작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그의 비상에 날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얼굴과 존재감, 매력을 재확인시킨 성공이라는 점은 고무적이다. 동 나이대 배우들과 달리 주지훈에겐 2030 대중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모델출신 다운 프로포션과 잘생긴 얼굴은 분명 배우로서 큰 장점이다. 그러나 그의 진짜 매력은 '미남 배우의 전형'에서 벗어난 마이너 한 감성과 아이덴티티에서 발산된다.

주지훈은 20대 시절 '미남 배우의 전형'을 보여주며 스타덤에 올랐고, 현재는 '미남 배우의 전형'을 벗어난 매력으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미남 배우의 무게감과 과묵함 대신 친근함과 위트로 무장한 주지훈은 완벽한 영웅이 아닌 아웃사이더 츤데레 영웅으로 '중증외상센터'의 백강혁 캐릭터를 완성했다. 그의 실제 아이덴티티와 퍼스널리티에 더 맞는 건 후자다. 옷에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어졌다. 대중은 '지금의 주지훈'에 강력한 호감을 보내고 있다.

물론 백강혁은 판타지를 구현한 캐릭터가 맞다. 그러나 소설 속, 웹툰 속 백강혁은 주지훈이라는 필터를 관통하고 난 후 묘한 '재수 없음'과 '양아치스러움'이라는 아이템을 탑재했고, 이는 이 인물이 개성 있게 재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장악한 현재의 인기를 생각한다면, '중증외상센터'의 시즌2 제작은 필연적인 결과다.

주지훈은 최근 인터뷰에서 "배우는 월세살이를 하는 존재"라고 표현했다. 한 작품에 몇 달씩 투신하고, 그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여느 배우나 작품에 투신하고 캐릭터에 몰두한다. 직업인으로서의 당연한 노력이다. 그 고생이 달콤한 성취로 돌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은 담보할 수 없다. 작품이 대중의 선호와 니즈를 적중하고, 배우의 연기와 매력이 대중의 가슴 불을 지피는 경우는 흔치 않다.

주지훈은 배우로서 2기를 맞이한 30대 중반부터 "40대가 기다려진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3년 전, 40대 관문을 통과했다. '중증외상센터' 현장에서 최고참이었던 김의성은 주지훈에 대해 "나이 들수록 더 멋있는 배우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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