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주랩소디’가 2월 초 기준 인기 프로그램 3위에 오를 정도로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한우랩소디, 치킨랩소디 등으로 이어진 ‘랩소디 시리즈’는 음식과 술,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며 사랑받아 온 푸드 인문 다큐멘터리다. 이번 진행(프리젠터)도 백종원 요리연구가가 맡았다. 본지는 전통주 소믈리에의 시각에서 소주랩소디에 등장한 화제의 우리술을 심층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넷플릭스를 보다가 궁금증이 들었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겨울, 우리술 한잔이 간절해질지 모른다.
1894년 우리나라에서 술 빚는 가구를 조사하자 31만4000가구라는 결과가 나왔단다. ‘소주랩소디’에서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장의 표현에 따르면 “한집 건너 두집은 술을 빚었다”는 이야기다. 술은 사 먹는 것으로 아는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원래 집에서 술을 빚고 마시는 ‘가양주(家釀酒)’ 문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식민지 재정 확보를 이유로 주세법을 제정하면서 이 문화는 사라졌다. 가양주는 ‘탈세’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고 소수의 대형 양조장만 관리해 행정 효율을 높였다. 1934년 가정용 제조면허 제도를 폐지하면서 가양주는 완전히 상업적으로 변했다. 가문의 술은 그렇게 하나둘씩 사라졌다.
가양주란 개념이 무릇 희미해진 요즘에도 집집이 술을 빚는 지역이 몇몇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 땅끝에 있는 해남을 넘어 자리한 전남 진도다. 그곳엔 진돗개, 진도아리랑만큼이나 유명하고 진도의 삼보삼락(三寶三樂) 중 하나라 불리는 ‘진도홍주’가 있다. 홍주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석류알 같은, 루비 같기도 한 붉은색 증류주다. 고산자 김정호는 홍주더러 ‘잔에 떨어진 홍매화’랬다. ‘전남여성생애사’라는 책에선 ‘야망의 색, 꿈의 맛’이라 한다. 세상의 어떤 붉은 것들을 옆에 세워도 홍주는 지질 않는다.
“집마다 홍주 담는 집이 많아요. 내가 서른셋에 했든가 넛(넷)에 했든가. 그런 때 해갖고 지금 내가 칠십팔이요.”
‘소주랩소디’ 2부에서 강삼길 전남 무형유산 진도홍주 전승교육사는 진도홍주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홍주의 밑술(바탕이 되는 술)은 보리쌀로 고두밥을 지어 만든다. 고두밥은 술 빚는데 짓는 밥으로 고들고들한 밥을 말한다. 일주일 뒤에 다시 고두밥을 해 넣는 덧술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만든 술을 두번 담금한 ‘이양주’라고 부른다. 만든 술은 한 달을 넘게 뒀다가 술이 익으면 소줏고리에 끓여 내린다. 이는 다른 소주 만드는 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소줏고리에서 술이 나오는 통로인 부리 모양을 한 귀때에 ‘지초’를 두는 게 독특하다. 이러면 소주가 지초를 지나면서 투명한 술이 붉게 물들게 된다. 지초(芝草)가 홍주의 붉은빛을 내는 비밀이다.
지초는 ‘자줏빛 자(紫)’를 써서 자초(紫草)라고도 불린다. 뿌리가 마르면 자줏빛이 나는데 말려 한약재로도 쓰고 염료로도 활용한다. 동의보감에선 배앓이나 장염, 해열 등에 이롭다고 알려진 약재다. 진도홍주는 원나라의 홍주가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진도군에 따르면 항몽삼별초군의 입도, 양반 유배인의 전수, 남방문물의 전승 등 여러 유입 경로를 추정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지초에 대해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선 하얀 눈이 쌓일 정도로 추운 날엔 약초꾼들이 눈밭 속에서 핏자국을 찾는다는 게 있다. 지초 뿌리가 베어 흰 눈에 물들면 그게 마치 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진도홍주를 논할 때는 2013년에 돌아가신 무형문화재 26호, 진도홍주 제조명인인 고(故) 허화자씨도 빠질 수 없다. 오래된 가양주들이 그렇듯 진도홍주 역시 밀주로 빚어왔다. 1960년대 양곡관리법으로 나라에서 쌀로 술 빚는 게 금지됐을 때, 홍주를 빚던 이들이 대부분 들킬까 염려하며 애오라지 장작불을 때서 술을 내렸고 허 명인도 그중 하나였다. 생계를 위해 빚던 술맛은 맵고 떫으면서도 구수한 그의 인생과 같았다. 이후 전통주 진흥 정책으로 진도홍주가 볕으로 나오자 허 명인은 진도군과 함께 홍주 제조법을 공식적으로 남긴다. 지금은 진도홍주를 현대식으로 양조하는 곳도 진도에 일곱 군데나 있다. 아래는 진도군에서 공개한 전통식 제조 방법이다.
진도홍주의 전통식 제조 방법
1. 쌀과 보리쌀을 7대 3의 비율로 섞어 고두밥을 짓는다.
2. 고두밥을 누룩 한 되와 섞어 항아리 등에 넣고 20~23℃ 온돌방에서 15일 정도 발효시킨다.
3. 발효가 완료된 덧술을 가마솥에 붓고, 60℃ 정도 예열하여 비점이 낮은 휘발성분을 제거한다.
4. 가마솥에 소주고조리를 올리고, 소주고조리 윗부분에 냉각수를 붓고 가열하면 증류된 소주를 얻어낸다.
5. 잘게 썬 지초 뿌리를 넣은 삼베 주머니에 소주를 통과시키면 선홍색 홍주가 된다.
진도홍주의 맛은 어떨까. 맛없다는 오해도 숱하지만 막상 마셔보면 그 안에 우주같이 넓고 깊은 맛이 숨어있다. ‘소주랩소디’에서 강삼길 전남 무형유산 진도홍주 전승교육사는 “달크무레해서 포도 맛도 나는 것 같고 복숭아 맛도 나는 것 같고 기가 맥히재”라고 전한다. 개인적으론 향긋함보다는 뿌리 약재에서 나는 오묘한 흙 향이 느껴진다. 진도에선 이런 홍주엔 어슷하게 썬 간재미에 고춧가루, 막걸리, 식초, 깨소금, 미나리를 넣어 버무린 간재미무침 안주를 곁들인다. 진도민들 말대로 ‘얼척없이(기가 막히게)’ 맛있다.
진도홍주를 마시는 또 다른 방법은 칵테일로 즐기는 거다. 진도홍주는 높은 도수와 붉은색 때문에 칵테일로도 인기 있는 전통주다. 맥주를 따른 잔에 진도홍주를 서서히 따르면 바다 위에 출렁이는 태양 같다고 ‘일출주’라 부르는 칵테일이 된다. 주류 관련 자격증 가운데선 유일하게 국가자격증인 조주기능사 시험엔 ‘진도(Jindo)’라는 칵테일이 실기 문제로 나온다. 민트맛 리큐르와 청포도 주스, 라즈베리 시럽을 더한 매력적인 칵테일이다.
진도홍주에 관해선 누구보다 강렬한 시를 쓴 이생진 시인의 ‘허여사’가 문득 떠오른다.
(전략)
그제야 술이 묻는다
너는 술만큼 투명하냐
너는 술만큼 진하냐
너는 술만큼 정직하냐
이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내 얼굴빛
내 얼굴빛이 홍주빛일 때
비로소 내게 홍주 마실 자격을 준다
박준하 기자(전통주 소믈리에) june@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