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연금의 장기적 재정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제1의 원인은 ‘저부담 고급여’ 즉 적게 내고 많이 받아가는 연금재정의 설계상 문제다. 그럼에도 다수의 사람들은 기금 운영만 잘하면 적자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만의 진실일 뿐이다. 이와 같이 역설적 현상은 본말을 전도하는 역기능도 한다.”
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상균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0년 내놓은 저서 ‘낙타와 국민연금’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합니다. 김 교수가 국민연금을 낙타에 비유한 것은 ‘국민연금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낙타를 바라볼 때와 똑같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흘간 물을 마시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인내력을 가진, 모래 먼지를 이길 수 있는 이중 눈꺼풀을 가진, 한 번에 500㎏을 옮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죽어 고기와 가죽을 사람에게 남기는, 사막을 건너는 사람에게 낙타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낙타는 이국적인 동물입니다. 유용한 동물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우리에게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노후'라는 사막을 건너는 데 꼭 있어야만 하지만 어쩐지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지난 6일 보건복지부 출입기자들과 만난 김 교수는 “낙타는 너무 순한 것 같다”며 “호랑이(와 국민연금으)로 바꿔야겠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2월 임시국회에서 합의될 듯 합의하지 못한 ‘모수개혁(보험료율·소득대체율 조정)’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나온 발언으로 보입니다.
김 교수는 “국민연금이 복지국가의 황금기였던 1945-1972년을 끝으로 확장 모드에서 축소 모드로 전환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축소 지향의 연금개혁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돼야 하는 ‘연속성’이란 특성을 지닌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연금개혁에는 소규모 개혁과 대규모 개혁이 공존한다”며 “합의에 기반하지 않은 개혁은 막대한 사회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김 교수는 “연금개혁은 긴 세월에 걸쳐 연속적으로 반복하는 작업으로 인내심과 합리적 판단이 부족하면 성공하기가 힘들다”며 “1998년에 시작했으니 이제 25년이 경과하였을 뿐 앞으로도 갈 길이 멀고 험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김 교수는 “연금개혁에 있어 정치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제일의 덕목은 합의를 도출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자동조정장치 도입 여부에 한시가 시급한 모수개혁이 가로막힌 데 대해서는 작심 비판을 쏟아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 국회의장과 국무총리, 여야 대표 등이 시시콜콜한 것으로 갑론을박하고 있다”며 “이건 진심으로 합의를 볼 의향이 없다고 밖에는 표현 못 하겠다”고 비판했습니다.
아울러 “모두 손 떼고 실무진한테 넘겨야 한다”며 “실무진에서 합의하면 그대로 (합의안으로) 넘겨야 쉽게 되지 않겠나. (자동조정장치도) 조건부로 도입해 몇 년부터 어디까지 한다든지 등을 논의하면 된다. 어려울 게 없다”고 제안했습니다.
같은 날 정부 측이 빠진 채 열린 국정협의체 2차 국정협의회에서는 모수개혁을 먼저 협의하고 자동조정장치 도입 여부는 추후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에서 구조개혁 문제와 함께 논의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여야는 ‘내는 돈’인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올리는 데에는 공감대가 있지만, ‘받는 돈’인 소득대체율을 놓고 국민의힘은 43%를, 더불어민주당은 44%를 각각 주장하면서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 했습니다.
양측이 10일 재차 의견 접근을 시도하기로 한 가운데 초대받지 못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자동조정장치는 노후 소득 보장과 국민연금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핵심 요소로서, 모수개혁과 함께 논의될 사항”이라고 사실상 딴지를 걸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연금개혁은 3월에도 헛돌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닌 ‘조조익선’(早早益善)을 주문한 김 교수의 발언을 곱씹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