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는 넷플릭스 '최초 3억 뷰 돌파'와 빌보드 '싱글차트 8주 연속 1위'를 동시 달성한 올해 최고 흥행작이다. 완성도 높은 음악, 세밀한 연출, 감각적 스토리텔링을 결합해 세계적 신드롬과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 팬덤을 형성했다.
팬코노미(팬+이코노미)의 확산으로 '케데헌 효과'는 투자액의 10배를 웃도는 산업적 가치를 창출하며, 한국 관광과 소비 산업까지 파급됐다. 그러나 감독과 주요 스태프, 아티스트가 한국계였지만 국내 제작 기술이나 플랫폼이 중심 역할을 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콘텐츠와 기술 인프라의 간격을 AX로 극복해야
K콘텐츠가 글로벌 주류로 부상했지만, 콘텐츠 제작과 유통은 여전히 해외 자본과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다. 국내 콘텐츠 산업은 창작 역량이 뛰어난 반면, 기술과 인프라에 테크기업의 참여와 역할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두 간극을 극복할 전략은 바로 콘텐츠-미디어 인공지능 대전환(AX)이다. 기획·제작·유통 전 과정을 인공지능(AI) 융합·내재화해 문화적 영향력을 산업적 성과로 만들고, 지속 가능한 성장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실제로 AI는 영상 합성, 음성 생성, 자동 편집 등에서 제작 효율을 혁신하고 있다. 전통적인 테크기업도 '버추얼 특화용 스튜디오'에 런웨이(Runway) 등 AI 영상 생성 모델들을 적극 결합해 자유자재로 고화질 배경 영상 제작, 실시간 스트리밍 등을 제공하며 '콘텐츠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결국 콘텐츠·미디어 경쟁력 핵심은 AI 내재화 역량이다. 전 세계 스크린을 장악한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경쟁력 또한 콘텐츠 양이 아니라 'AI와 데이터'에 있다. 수억명 시청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지역별 흥행 콘텐츠를 예측하고, 이용자 취향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정밀하게 추천한다.
◇AI '내재화'로 콘텐츠·미디어 산업 전주기 혁신해야
기획-제작-후반제작-서비스로 이어지는 전주기 구조에 AI·데이터 중심 미디어테크 기업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구글과 오픈AI는 실사 수준 영상을 생성하는 비오(Veo)와 소라(Sora)를 공개하며 기술적으로 한발 앞서가고 있다. 우리도 콘텐츠 산업의 엔진인 창작용 고성능 멀티모달 AI 모델 확보를 위한 도전과 투자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
제작 과정에 버추얼 프로덕션, VFX, 리얼타임 렌더링, 몰입형 사운드 등 AI 기술을 적용하면 통상 3~4일 걸리던 폭파 장면을 1분 만에 구현할 수 있다. 국내 최초로 AI를 활용해 제작된 장편 영화 '중간계'는 후반작업 기간을 기존 1년에서 한 달 반으로 단축하며 가능성을 입증했다. AI 자막·더빙 자동화, 입모양 동기화 기술, 스튜디오 촬영 없이 특수효과를 구현하는 버추얼 프로덕션 등은 제작비 절감과 품질 향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프로그래밍 가능한 미디어' 시대가 오고 있다. AI가 장면을 인식해 광고를 자연스럽게 삽입하는 AI PPL(Product Placement), 시청 환경에 따라 영상·음향을 자율 조정하는 지능형 미디어 기술이 현실화되고 있다. 단순한 소비를 넘어, AI가 콘텐츠의 구조와 가치를 재편하는 '미디어 지능화' 단계로의 진입이다.
AI 내재화는 콘텐츠 혁신을 넘어 클라우드 인프라, 데이터 전송 네트워크, OTT 플랫폼 등 전 산업에 걸친 전략적 전환점이다. 콘텐츠 제작에서 유통·서비스까지 이어지는 K콘텐츠 플랫폼 구축이 시급하다.
◇K콘텐츠 플랫폼 구축으로 K웨이브 주도권을 확보해야
앞으로 콘텐츠 경쟁력은 '무엇을 만들었는가'를 넘어 '어떤 기술로 어느 정도 수준으로 전달되는가'에 달려 있다. 시장조사에서 송출까지 AI 기술력과 데이터 활용 역량이 핵심 승부처다. 콘텐츠의 창의성과 스토리텔링에 AI·정보통신기술(ICT)을 융합하면 제작 효율성을 넘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전주기 AI 제작 인프라 확충 △AI를 위한 데이터 활용 규제 완화 △콘텐츠·미디어 연구개발(R&D) 성과의 산업화 △산·학·연 협력형 인재 양성이 병행돼야 한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내재화된 미디어 산업은 제작비 절감을 넘어 광고·커머스·교육·가상융합 등으로 확장 가능한 신산업 플랫폼이 된다. 인기 드라마, 영화 등 콘텐츠 기반의 버추얼 공간, AI 아티스트를 통한 팬 소통, 데이터 기반 맞춤형 커머스 등은 콘텐츠 산업이 새로운 엔진이 되는 대표적 사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은 콘텐츠·미디어 산업에 AI를 전면 도입하는 R&D 사업을 추진 중이다. △AI 특수효과 및 가상제작 △시청 데이터 기반 맞춤형 서비스 △AI 광고 시장 확장 등이 주요 목표다.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미디어 기업과 AI 테크기업이 공동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K콘텐츠의 강점에 AI·ICT를 융합한 독자적 경쟁 모델을 구축해야 K플랫폼이 글로벌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
◇제2의 '케데헌'을 위한 준비와 도전
K콘텐츠는 이미 'K웨이브'로 세계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이제는 K플랫폼이 AI 중심의 기술·데이터·서비스 주도권을 확보해 콘텐츠·미디어 산업의 가치사슬을 완성해야 한다. 장기적 R&D 투자, 산업 간 협업, 글로벌 시장 개척을 통해 콘텐츠, AI 모델, 클라우드, 네트워크가 융합된 'K플랫폼 생태계'를 조성해야 AX 2.0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기술·콘텐츠·시장 세 축을 갖춘 'K콘텐츠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제2의 '케데헌'을 우리 힘으로 세계로 확산시킬 도전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엔진이 될 것이다.
홍진배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원장 jbhong09@iitp.kr
〈필자〉 1996년 38회 행정고시로 정보통신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영국 맨체스터대 기술경영학 박사로 30년 가까이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서 통신정책관, 정보보호네트워크정책관, 네트워크정책실장을 역임했다. 지난해 2월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원장으로 부임, 정보통신기술(ICT) 연구개발(R&D)과 인재양성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2003년 대통령 표창, 2021년에는 대통령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