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풍악(楓岳·가을 금강산 이름)에 여행 가서 표훈사에서 자게 되었다. 주지가 밥상을 차렸는데, 떡 한그릇이 있었다. 이것은 구맥(瞿麥)을 곱게 빻아 체로 아주 많이 친 다음에 꿀물과 석이를 함께 뒤섞어 놋쇠 시루에 찐 것이다.”
이 글은 1611년 음력 4월, 허균(許筠, 1569∼1618년)이 집필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나온다. 허균이 금강산으로 여행을 간 때는 1603년 가을이었다. 당시 허균은 유람을 즐길 만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금강산으로 떠나기 전에 재종형인 허체(許褅)에게 보낸 편지에서 허균은 이렇게 적었다.
“당로자(當路者·권력자)가 저를 액운에 빠뜨려 몰아냈습니다.”
그해 허균은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역사 기록과 편찬 담당)과 지제교(知製敎·국왕의 교서 등을 작성하는 일 담당)를 겸직할 정도로 요직에 있었다. 그런데 8월에 질녀의 혼사와 관련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표훈사 주지 담유(曇裕)는 허균이 오는 줄 미리 알고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주지 담유가 준비해둔 떡의 이름을 ‘석이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석이병 만드는 방법을 간단하게 적어뒀다.
먼저 허균은 ‘구맥’을 석이병의 주재료로 보았다. 구맥은 ‘술패랭이꽃’의 다른 이름으로 한의학에서는 약재로 사용한다. 유중림(柳重臨, 1705∼1771년)은 ‘증보산림경제’(1766)의 ‘치선(治膳)’ 편에서 허균의 ‘풍악석이병(楓嶽石耳餠)’을 소개했다. 그는 허균이 구맥이라고 한 것을 두고 “구맥은 바로 패랭이꽃(石竹) 꽃씨니,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이맥(耳麥)을 잘못 알고 쓴 것 같다.”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여기에서 ‘이맥’은 ‘귀리’다. 그러니 허균이 금강산 표훈사에서 먹은 석이병은 구맥이 아니라 귀리를 주재료로 만든 떡이라고 봐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재료는 ‘석이’다. 석이는 주로 산골짜기 외딴곳에서 바위에 붙어사는 버섯으로, 마치 검은색 종이를 구겨서 찢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 모양이 귀를 닮아서 한자로 ‘石耳(석이)’라고 적는다. 그런데 허균은 한자로 ‘석이(石茸)’라고 적었다. ‘이(茸)’의 원래 발음은 무성하다는 뜻의 ‘용’이다. 그러나 버섯을 뜻할 때는 ‘이’라고 읽는다.
귀리를 곱게 빻아서 체에 친 뒤 거른 귀리 가루를 다시 빻아 체를 치면 매우 고운 가루가 된다. 여기에 다진 석이버섯을 넣고 섞은 다음에 꿀물을 조금 붓고 손으로 덩이가 지지 않게 흩뜨린다. 이것을 놋쇠 시루에 안쳐서 찐 떡이 바로 석이병이다. 귀리 가루는 맑은 회색에 가까운데, 여기에 곱게 다진 석이버섯을 섞어 꿀물을 타면 옅은 황색으로 변한다. 이것을 시루에 찌면 마치 황색 떡에 검은 점이 박힌 듯한 석이병이 완성된다.
허균보다 후대 인물인 권두인(權斗寅, 1643∼1719년)은 석이버섯이 맛있는 먹을거리이긴 하지만 이를 따려다 바위에서 추락해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부서지기도 하며 죽는 사람도 자주 생긴다면서 백성에게는 ‘부역의 독’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석이버섯은 당시에 구하기 어려운 재료였다. 하지만 맛은 고기 같고 몸에도 좋았던 탓에 찾는 사람이 많았다. 일찍이 생육신 김시습(金時習, 1435∼1493년)은 볶은 석이가 마치 고기를 먹은 듯하고 먹고 나자 속마음이 시원하다고 시로 읊조렸다. 2025년 새해가 밝았지만 지난해 12월 내란과 항공기 추락 등 연이은 사건·사고로 모두의 가슴이 먹먹하다. 석이병을 마련하기 어렵다면 시루떡이라도 구해서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속마음이라도 시원하게 해보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민속학 교수·음식 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