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팀61 대표)는 ‘투 머치 토커’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 머치 토커’라고 소개한다.
“제가 1994년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로 시작하는 박찬호의 ‘설명’은 인터넷 밈으로 회자된 것은 물론 박찬호가 출연한 광고의 소재로도 사용됐다. ‘말이 아주 많은 아저씨’의 친근한 이미지는 박찬호를 대중과 가깝게 만들었다.
그런데, 박찬호는 왜 ‘투 머치 토커’가 됐을까.
박찬호는 1994년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로 LA 다저스에서 뛰었다. 메이저리그 진출 초기만해도 말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미국식 발음이 섞인 “암… 제가…”로 시작하는 말투가 오히려 트레이드 마크였다.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고, 설명이 길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경력이 길어지고, 베테랑이 되고, 아시아 투수 최다승의 주인공이 된 뒤 오릭스를 거쳐 한화 이글스에서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과정에서 박찬호는 ‘투 머치 토커’가 됐다. 한화에서 투수로 뛰었던 2013년에는 이미 ‘투 머치 토커’였다.
박찬호는 최근 박찬호의 ‘멘토’라고 할 수 있는 이태일 프레인 스포츠 부사장과 함께 책
이 부사장에 따르면 박찬호가 ‘투 머치 토커’가 된 것은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를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스며든 습관 때문이다. 박찬호는 ‘통역’도 없던 시절 메이저리그에 진출했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문화 때문에 초반 시행착오는 물론 오해가 많았다. 불필요하게 주변에 적대적일 때도 있었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답과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한 적도 많았다.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던 시절도 길었다.
박찬호가 고생 끝에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활약하던 때, 박찬호의 뒤를 이은 도전자들이 속속 생겼다. 서재응, 김병현, 김선우, 최희섭 등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말이 길어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 부사장은 “후배들은 시행착오를 덜 겪게 하겠다는 뜻에서 후배들과 얘기할 때 아주 작은 것들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미국 생활 초창기, 영어가 능숙하지 않던 시절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길게 설명하던 습관이 한국어를 얘기할 때도 더해지면서 점점 더 길게 말하게 됐다고 이게 ‘투 머치 토커’가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