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폰에서 에미넴의 ‘루즈 유어셀프’가 귀에 꽂혔다. 몸풀기처럼 슬슬 시작한 랩 비트에 가속도가 붙어 심장마저 두들길 때, 초조함이 잦아들고 상승감이 찾아왔다. 출전이 다가왔다. 대회 진행요원이 그를 불렀다. “이도현 선수!”
지난달 26일 저녁, 서울 올림픽공원이 들썩였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 세계선수권대회 리드 부문 결선. 이도현(23·블랙야크·서울시청)은 높이 15m 벽을 쳐다본 뒤 홀드(손으로 잡는 부분)를 하나씩 제압해 올랐다. 차곡차곡, 그렇게 쌓인 홀드의 수가 곧 성적. 그런데 30번 홀드. 그의 발이 미끄러졌다. “앗!” 중계석에서도, 관중석에서도 터진 비명. 하지만 그는 결국 4분 43초의 오름짓 끝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남자 최초다. 2012년 김자인(37)에 이은 한국의 두 번째 세계선수권 우승이기도 하다. 대회 엿새 뒤인 지난 2일. 이 선수를 만났다.
큰 대회 뒤에도 계속 훈련이네요.
“17일부터 열리는 부산 전국체육대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오늘은 ‘쉬는 훈련’ 중입니다. 회복도 훈련이거든요.”
그가 강조하는 휴식은 경기 중에도 효과를 봤다. 30번 홀드를 잡는 순간 발이 미끄러지자, 그는 급히 몸을 추스르고는 쉬었다. 이미 한 차례 휴식한 뒤이기도 했다. 이 선수는 “그 두 차례의 쉼이 금메달로 향한 포인트 중 하나”라고 했다.
포인트가 더 있었습니까.
“힘에 부쳤어요.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였죠.(관중은 이 상황을 ‘오토바이 탔다’고 표현했다) 로프를 걸면서 힘을 빼느냐, 생략하고 그냥 올라가느냐. 후자를 택했습니다. 몸을 날렸죠. 추락 직전 44번 홀드를 건드린 게 점수로 연결됐어요. 1위로 올라섰어요. 야구로 치면 결승 타점이죠. 마지막 선수가 예상 외로 일찍 추락한 ‘운’도 있었지만, 이런 ‘한 걸음 더하기 위한 포기’도 더해져 메달 색깔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앞으로 펼쳐질 제 삶에서 무수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텐데, 예행 연습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선수는 ‘클수저’로 불린다. 금수저나 흙수저처럼 태어날 때부터 클라이머라는 말. 인터뷰가 진행된 서울 노원구의 비숍클라이밍은 아버지 이창현(53)씨가 운영하는 실내암장이다. 이씨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선수로 뛰었다. 그는 “도현이가 네 살 때 첫 등반을 했다”고 떠올렸다. 정작 이 선수는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라며 웃었다. “아버지에게도 혼나기도 하느냐”고 묻자 이씨가 대신 답했다. “월클(월드클래스) 선수를 내가 어떻게. 저를 한참 전에 넘었어요. 지금은 멘탈 코치 역할을 해요.” 이 선수는 “이번에도 그러셨죠”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던가요.
“세계선수권 2주 전 월드컵 시리즈 마지막인 13차 대회에서 10위에 머물렀어요. 잘못이 뭔지 물어봤어요. ‘넌 이도현이야. 네 스타일대로, 리듬을 타면서 등반해’라는 말이 돌아왔어요. 부진이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국가대표 감독 아버지와 함께 뛴 적이 있지요.
“사실 뛰지는 못했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0~2021년이었거든요. 국내외 대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2021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할 자신이 있었는데, 대회가 열리지 않아 과거 성적으로 출전권을 줘서 못 나간 아쉬움도 있었고요.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는 너무 부진했고요. 아버지의 멘탈 코칭이 없었다면 극복 못 했을 겁니다. 그런 경험이 보약이 됐고요. 감사합니다, 아버지.”(웃음)
라이벌이 있습니까.
“모두가 라이벌입니다. 기량이 다 비슷하거든요. ‘관중과의 싸움’이기도 해요. 함성에 오히려 위축되기도 하거든요. 관중과 동화돼야 해요.”
그는 볼더 부문에도 출전해 3위에 올랐다. 볼더는 4~5m 높이의 벽에 제시된 문제를 풀면서 오르는 분야다. 이 선수는 볼더 경기를 치르며 관중의 호응을 유도했다. “그런 스타일을 아닌데, 리드에서 금메달을 따서 즐긴 것 같아요.”
그는 2022년 국가대표 행보를 본격화했다. 월드컵과 세계선수권에서 열세 번 포디엄(3위 이상)에 올랐다. 1위만 다섯 번. 현재 볼더와 리드 세계랭킹은 각각 3위다. 볼더·리드 합산은 2위다.
세계선수권 금이 꿈이었다고요.
“세계선수권 금이 조금 큰 꿈, 올림픽 금이 더 큰 꿈입니다.”
한국은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서채현(22)이 리드 동메달을 보태 금1 동2의 성적을 거뒀다. 2028년 올림픽에 앞서 내년 아시안게임, 2027년 세계선수권이 있다. 인터뷰를 끝낼 때 이 선수가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