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 문제 앞에 허망해진 ‘공정과 상식’

2024-10-16

프로야구를 즐겨 본다.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이 올해 도입된 자동볼판정시스템(ABS)이다. 카메라가 공의 궤적을 추적해 볼·스트라이크를 판정한다. 애매한 판정에 억울해 하는 선수들을 보는 스트레스가 없어졌다. 주심 성향을 파악하는 것도 선수 실력이라는 소리가 사라졌다. 올해 야구판에서 신인급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이유 중 하나가 ABS 때문이라는 소리까지 나온다. 명투수 출신 정민철 해설위원은 “ABS 도입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공정’과도 맞아 떨어진다”고 짚었다(중앙SUNDAY 9월 14~15일 자 대담).

명태균이 열어버린 판도라 상자

정권 약점 방치하다 수렁에 빠져

윤 정부 ‘공정과 상식’ 불신 쌓여가

‘법 앞의 평등’ 사즉생 각오 필요

요즘 최고의 넷플릭스 화제작 ‘흑백요리사’. 유명 셰프에게 무명 동네 요리사들이 도전하는 내용이다. 하이라이트는 백종원·안성재 두 심사위원이 눈을 가리고 판정하는 장면이다. 계급장(지명도) 떼고 맛으로만 평가하겠다는 ‘공정 선언’에 시청자들이 열광했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은 어느덧 ‘종교’가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사회 분위기를 업고 집권했다. 전임 정부 인물들의 위선을 파고들었다. 대선 캐치프레이즈도 ‘공정과 상식’이었다. 그러나 거룩한 이 두 단어는 임기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허망해졌다. 엊그제(15일) 명태균씨가 공개한 김건희 여사와의 카톡 화면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카톡 시기는 윤 대통령의 국민의힘 입당 직전이다. 잠재적 유력 대통령 후보의 부인이 ‘오빠’를 바보 취급하며, 일개 정치 브로커에게 ‘완전 의지’하는 상황은 상식적이지 않다.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가 김 여사의 친오빠라고 대통령실은 해명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친오빠가 왜 정치에 개입했으며, 무슨 역할을 했나. 정치가 ‘패밀리 비즈니스’였나. 명태균 문제가 불거지자 대통령실은 “명씨와 대통령 내외는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으며, 특별한 친분도 없다”고 해명했다. 거짓말로 드러났다. 친오빠라는 해명마저 사실이 아니라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지 모른다.

같은 날, 명씨가 2021년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자신이 관여하는 여론조사팀에 “윤석열을 좀 올려서 홍준표보다 2% 앞서게 해 달라”고 지시한 녹취록이 공개됐다. 이미 조사된 샘플 수에 간단한 산식을 가해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비록 ‘비공표’ 조사라고 하지만, 특정 후보 대세론 등에는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다. 명씨가 대선 1년 전부터 PNR이라는 조사업체를 통해 실시한 50차례의 여론조사 중 윤석열 후보가 1위로 나온 것이 48번이었다고 한다. 같은 기간 갤럽 등 다른 조사기관에서 1, 2위가 엎치락뒤치락하던 것과는 다른 결과다. 여론 조작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범죄다. 구체적 조사가 있어야겠지만, 윤석열 정부가 서 있는 초석에 불공정이란 주홍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윤석열 정부가 자랑스레 내걸었던 ‘공정과 상식’은 이미 앙상해졌다. 명품백, 도이치모터스, 특검법 앞에서 대통령 부인이 이런저런 논리로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민망한 단어가 됐다. 대통령이 ‘공정’ 종교의 사제(司祭)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배신당했다. 특수부 검사 출신 대통령에게 기대했던 당당함과 의연함 대신 먼지 쌓인 법전에서 법 조항을 뒤지는 법 기술자의 군색함만 남았다.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사건 최종 처분을 위해 검찰은 수사심의위를 여는 대신 내부 ‘레드팀’을 가동했다. 끝까지 법리를 따져본다는 취지겠지만, 예상대로 무혐의로 결론 날 경우 여론의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특검법에 찬성하는 여론이 60%가 넘는 것은 윤석열 정부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보수를 송두리째 위기에 빠트릴 수 있는 위험한 불신이다.

김 여사 문제는 후보 시절부터 지적받아 왔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취임식 하객 초청, 대통령 순방에 김 여사가 행사하는 권력의 그림자는 어른거렸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조심성도 없이 국정과 인사, 당무에 개입한 흔적이 자꾸 나오고 있다. 시중에는 대통령을 뜻하는 ‘V1’ 앞에 ‘V0’가 있다는 말이 진작부터 떠돌고 있었다.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대선 전의 다짐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뒤늦게 제2부속실을 설치한다지만, 이미 실기했다. 여론은 이미 김 여사가 당분간 대중의 눈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달래기 힘들 정도로 나빠졌다. 조심성 결여, 미숙함, 오만함이 결합한 결과다. 방 안의 코끼리마냥 모른 척하고 있다가 결국 명태균·김대남 사태를 맞았다.

지금 윤석열 정부에 필요한 것은 냉정한 자기 객관화다. 거센 여론에 탄핵 방어망을 지탱하는 8개의 기둥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김건희 라인은 없다” 같은 못 믿을 소리를 할 게 아니라, 사즉생 생즉사의 각오로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 진짜 농부는 굶어 죽어도 볍씨는 베고 죽는다고 했다. 김 여사 처리에서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잃어버리면 위기 탈출의 희망은 없어진다. 대통령이 계속해서 공정의 배교자라는 이미지를 얻어서는 보수 정권 재창출, 꿈도 꾸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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