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치명적 질병인 줄 알았는데...광고와 정치까지 지배하는 노스탤지어[BOOK]

2024-10-04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지음

손성화 옮김

어크로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유치환의 시 ‘깃발’에 나오는 노스탤지어는 고향이나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말로 풀이된다. 이 시가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발표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100년 가까이 시문학 등에서 노스탤지어라는 말이 즐겨 사용된 것 같다.

그런데 이 노스탤지어는 서양 언어권에서 원래 있던 말이 아니라 만들어진 조어다. 그리스어 노스토스(nostos, 귀향)와 알고스(algos, 고통)를 합쳐서 지은 노스탤지어(nostalgia)는 ‘고향을 향한 극심한 갈망’이란 뜻을 담고 있다.

스위스의 의사 요하네스 호퍼가 이를 주제로 연구한 1688년 학위논문 제목에서 유래했다. 호퍼는 스위스 용병들 사이에서 발생한 장애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타국에서 최후를 맞는 고통받는 청년들의 사연에 주목하고 이들이 앓는 불가사의한 질병에 ‘고향의 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심각할 경우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 죽기까지 하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영국의 감정사학자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는 21세기 현대에서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노스탤지어 신드롬을 파헤친 책 『노스탤지어』를 내놓았다. 17세기서부터 현재까지 노스탤지어의 전 생애를 역사학, 심리학, 신경과학, 의학적 관점에서 다층적으로 탐구해 이를 통해 본 근현대문명의 흥미로운 이면사를 소개했다.

노스탤지어의 출발은 질병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그 개념이 일종의 ‘무해한 감정’, 혹은 역으로 심리적 안정제로 바뀌었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부르는 상품과 정치적 이념들이 활개를 펴기 시작했다. 앨빈 토플러는 1970년 자신의 저서 『미래의 충격』에서 “노스탤지어의 물결이 세계를 뒤덮을 것이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1970년대에는 전 세계 도처에서 노스탤지어가 출몰했다. 골동품과 레트로(retro)한 것들이 갈수록 인기를 끌었다. 앤티크와 컬렉터블 모두 가격이 치솟았다. 바야흐로 ‘중고(中古) 70년대’가 열린 것이다. 연극이나 공연, 소설이나 패션 등 전 분야에 걸쳐 과거의 것들이 소환되고 유행했다.

노스탤지어 열풍은 미국에서 시작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을 휩쓸었다. 심지어 나치에 대한 향수마저 부활했다. 독일 거리에선 하켄크로이츠 나치 만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나치당 깃발들이 나부꼈고 나치 우표, 제3제국 음반도 버젓이 팔려 나갔다. 영국에선 나치 비밀국가경찰인 게슈타포의 배지, 나치스 친위대 SS의 단검 등이 합법적으로 판매됐다. 노스탤지어의 어두운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광고업계는 특히 노스탤지어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들에겐 그토록 돌아가고 싶던 시절로 우리를 태워다 주는 타임머신이 미래의 우주선보다 더 필요했다. 물론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마케팅과 소비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각종 온라인∙모바일 플랫폼과 쇼핑사이트, 소셜미디어에는 과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상품들이 판을 친다.

정치권에선 노스탤지어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는 현대판 노스탤지어 장사꾼이었다. 그가 대선 운동에서 내건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는 현재에 대한 암묵적인 비판과 미국의 과거에 대한 동경이 모두 들어 있었다.

같은 해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찬반 국민투표에서도 노스탤지어는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EU 측의 브렉시트 협상 수석대표였던 미셸 바르니에는 브렉시트의 책임을 “영국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돌렸다. 독일 통일 후 동독에서는 과거 공산주의 시절의 동독에 대한 향수를 뜻하는 ‘오스탈기(Ostalgie)’가 짙게 퍼지기도 했다.

세계화가 급속히 이뤄지고 초특급 교통이 발달한 지금 노스탤지어는 질병적 차원에선 극복하기 쉬워졌지만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에서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향수병이 자주 찾아오는 이 가을에 노스탤지어라는 주제는 특히 잘 어울린다. 노스탤지어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한번 펼쳐 보기 바란다. 모처럼 향수에 젖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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