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실을 거두게 하는 풍요로움의 전령, 가을바람이 상쾌하다. 유난히 길었던 올 추석의 연휴는 일상에서 벗어나 무언가 한가지 정도는 도전해 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맘때면 어린 시절, 조그마한 암자 마루턱에 홀로 앉아 햇살 가득한 텅 빈 마당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일, 밤늦도록 커다랗고 둥근달이 휘영청 떠 있고 그 빛을 받은 나뭇잎들이 윤슬처럼 반짝이던 광경들이 떠오른다. 이순(耳順)이 넘도록 이 한가롭고 고요한 장면들이 추석마다 떠오르는 건,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산승(山僧)에겐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마음은 생각을 담는 그릇일 뿐
명상 잘하려는 생각도 버려야
고요한 공간, 본래 마음 드러나

지난해부터 추석 연휴 기간의 여유로움을 함께 보낼 사람들을 모집하였다. 의외로 방이 부족할 만큼 많은 분들이 안성 수행처로 모여들었다. 8일 동안 말문을 닫는 묵언(默言)을 하고, 매일 하루 두 끼 식사와 한 번의 다도 체험, 세 차례 참선 수행을 반복한다. 모든 일정이 멈추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마음공부 과정이다.
가족과 함께할 시간도 포기하고, 해외여행의 유혹도 떨쳐내고 오로지 ‘나를 찾기’ 위해서 알토란 같은 시간을 내어 찾아온 하나같이 소중한 반연(絆緣)들이다. 넓은 반야의 뜰에 쏟아지는 별빛도, 한가위 둥근 달빛도 볼 수 없게 연휴 내내 비가 내렸다. 대중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우안거(雨安居)’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나의 본래면목을 찾아 마음 다해 쏘아 올렸더니 세찬 비도 너라고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산처럼 앉아 하루 이틀 삼일…등에는 계곡물처럼 땀이 흐르고, 사흘째는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밖으로 향했던 마음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따뜻했습니다. 바쁘게 쫓기며 생활했던 저에게 자유롭고 당당함과 여유로움이 생겼습니다.’ (민××)
‘그동안 남 탓을 하고 자신을 원망했던 어리석음을 깨달아 절합니다. 평화로울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왜 그런가가 궁금했는데 내 안에 고요한 바다 같은 곳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묵언을 통해 내 안의 말들에 귀 기울이게 되었으며, 말로 내뱉어지기 전에 나를 다시 만나게 되어 감사합니다.’ (손××)
조금은 지친 기운도 보였던 눈빛들이 8일간의 수행을 거쳐 밤하늘의 별처럼 반야의 빛으로 승화했음을 확인할 때, 나는 본분사(本分事)를 다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중앙승가대학에서 1학년 학인 스님들을 대상으로 ‘마음의 흙탕물 가라앉히기’라는 실험을 하였다. 커다란 물통에 흙먼지를 넣고 막대기로 휘저으며 설명했다.
“사람에게는 몸통이 있는 것처럼 ‘마음통’도 있다. 몸통에 오염된 음식을 넣으면 병든 몸이 된다. 마찬가지로 마음통에 욕심, 감정, 고집 따위의 흙먼지를 넣고 휘저으면 어지럽고 불안하고 괴로운 마음의 병이 생긴다. 그러나 막대기를 빼고 기다리면 저절로 맑아진다.”
이 실험의 1단계는 ‘흙탕물을 자각하기’이다. “편안하게 앉아 눈을 감는다. 마음이라는 통에 지금 어떤 흙먼지(생각·감정)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 걱정, 계획, 판단이라는 흙먼지들…. ‘지금 내 마음은 흙탕물과 같구나!’라고.”
2단계 실험은 ‘휘젓는 손 멈추기’이다. “흙탕물을 멈추게 하려는 모든 노력을 멈춘다. 좋은 생각을 내려는 노력도, 명상을 잘하려는 노력까지도 내려놓는다. 마치 흙탕물을 휘젓던 손을 통 밖으로 빼내는 것처럼, 마음을 통제하려는 모든 의도를 놓아버린다.”
실험 3단계는 ‘판단하지 않고 관찰하기’이다. “그저 기다리기며 지켜본다. 중력의 법칙에 따라 흙먼지가 저절로 가라앉듯이, 마음의 법칙에 따라 생각과 감정들도 더 이상 에너지를 주지 않으면 서서히 힘을 잃고 가라앉는다. 그저 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지켜본다.”
마지막 4단계 실험은 ‘맑은 물을 그대로 느끼기’이다.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그 배경에 존재해 왔던 ‘맑은 물’, 즉 순수한 알아차림의 공간을 느낀다. 이 맑음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흙먼지에 가려져 있었을 뿐,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이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을 아는 이 ‘본래의 바탕’ 속에서 편안히 휴식한다.”
이 ‘마음의 흙탕물 가라앉히기’ 실험은 현대인의 일상생활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가 있다. 예컨대, 화가 나거나 삿된 생각이 휘몰아칠 때 즉시 반응하는 대신에 마음속으로 ‘휘젓기 멈춤!’이라고 외쳐보는 것이다. 느낌에서 0.5초 만에 감정으로 즉각 반응하며 흙먼지를 일으킨다. 이때 30초 만이라도 숨을 가다듬고 지켜보며 흙먼지가 가라앉을 시간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동적인 행동을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음은,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을 담는 공간이다. 생각을 붙잡지 않고 멈추거나 쉬면 이내 ‘고요한 공간’을 자각하게 된다. 이 고요한 공간이 바로 우리의 ‘본래 마음’이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