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한국을 첨단기술 협력이 제한될 수 있는 ‘민감국가’에 지정한 것으로 16일 확인되면서 국내 원전 및 반도체 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아직 구체적인 제재 수준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각종 첨단 기술 분야에서 물품 수출입이 제한되거나 인재 영입 등에서도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 업계에서는 인적 교류나 수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감국가는 미 정부가 △안보 △핵 비확산 △지역 불안정 △경제안보 위협 등 정책적 이유로 특별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원자력 업계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폴란드 등에서 진행되는 해외 원전 수주 협상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틀어질 수 있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원전 산업은 그 특성상 신기술 개발과 원전 운용 전 주기에 걸쳐 국제 사회의 감시를 받기 때문에 정상적인 영업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이기복 원자력학회장은 “핵연료를 들여오는 것부터 원전 기술을 활용하고 수출하는 모든 단계를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미국 에너지부가 지켜보고 있다”며 “과거엔 문제없이 해오던 작업을 승인받아야 하거나 절차가 지연될 경우 산업 전반에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한미 양국이 진행하는 다양한 연구과제들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의 원전 수출 움직임에 고삐를 물리기 위한 미국 측의 전략적 움직임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민감국가 지정 시점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한국전력공사·한국수력원자력이 지재권 분쟁을 종료하기로 합의하고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시점과 겹치기 때문이다. 원전업계의 한 관계자는 “협상 과정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미국이 민감국가 지정 카드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규제가 장기화할 경우 소형모듈형원전(SMR) 개발이나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파이로 프로세싱)과 같은 차세대 원전 기술 개발에도 여파가 미칠 것으로 보인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SMR의 경우 설계 기술은 미국이 뛰어나고 제조·설치 역량은 한국이 더 낫다”며 “양국 협력에 따른 시너지가 상당한데 민감국가가 되면 어떤 형태로든 걸림돌이 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도 민감국가 지정에 따른 파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에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수출을 제한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발주를 금지하는 것처럼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이 같은 강력한 규제에 묶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오랜 우방인 한국이 북한과 러시아, 중국 등과 한 명단에 등재된 것 자체가 충격적인 일”이라면서 “어떤식으로든 규제가 결정된다면 반도체 속도전에서 밀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단 속도경쟁에서 밀리면 2030년 1179억달러(약 171조원)에 이르는 AI 칩 시장을 경쟁국가에 내줄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다만 이 명단에 대만 역시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점, 미국 역시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실제 규제는 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와 별도로 정부와 정치권의 설익은 핵무장론이 미국의 민감국가 지정을 부추겼다는 지적도 함께 나오고 있다. 정 교수는 “한국은 평화적 핵 이용의 모범국이었는데 불필요하게 핵무장론이 불거지면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이 학회장 역시 “한미 외교 당국 간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가 두 달 가까이 민감국가 지정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을 두고도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외교부는 관련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뒤늦게 “사안을 엄중하게 보고 있으며 정부 관계기관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 역시 에너지나 첨단 기술 산업 협력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지 뒤늦게 상황 파악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