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을 보셨나요? 안중근 참모중장의 ‘늙은 늑대 제거 작전’을 다룬 우민호 감독의 영화로 누적 관객 수 450만 명을 돌파하며 박스 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안중근 역은 현빈, 우덕순 역은 박정민이 연기하였으며 현빈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았다.
항일무장투쟁 역사학교 범도 루트 10기는 안중근 참모중장의 일생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단지동맹비가 있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를 시작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역까지의 5박 6일의 일정에 올랐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인천공항 직항노선이 있었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한국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으로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돼 직항노선은 없어지고 중국 연길공항으로 가서 버스로 러시아로 입국하는 코스로 진행되었다.
진격의 국경도시 훈춘-크라스키노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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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공항 입국 후 연길감옥 파옥 투쟁이 있었던 장소에 있는 연길감옥 항일투쟁기념비를 참배하는 것으로 이번 항일무장투쟁 역사학교 범도 루트 10기의 일정을 시작하였다. 연길에서 훈춘으로 가서 국제버스를 갈아타고 중‧러 국경을 통과하여 러시아 첫 방문지인 크라스키노에 도착하였다.
홍범도 부대가 오고 철혈광복단이 일본군의 현금 마차를 탈취하여 무기를 구입하러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던 진격로를 따라가는 버스에서 홍범도 부대의 활약상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 입국 수속을 할 때는 석양이 예쁘게 물들었지만 크리스키노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 되었다.
국경 버스에서 내려 러시아 버스로 갈아타고 크라스키노 전망대에 올랐다. 이미 한밤중이어서 사방은 어둠에 휩싸였지만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영하 18도의 추위였지만 당시 우리 선배 의병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역사의 현장을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춥다는 말을 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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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추 유니베라 농장에서 관리하는 안중근 단지동맹비를 방문하여 첫 단체사진을 찍고 안중근참모중장의 단지된 손바닥 형상에 손을 맞춰보았다. 기념비에 단체묵념을 하고 방현석 작가로부터 당시 상황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1909년에 김기룡, 백규삼 등 12명의 동지들이 결의를 다지기 위해 무명지 한마디를 자르고 그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글을 쓸 때의 당시로 돌아간 우리 대원들은 엄숙하고 결의에 찬 맹세를 가슴에 새겼다. 여기서 안중근과 12명의 동지들은 3년 내 적의 수괴를 격살하는 목표를 세우고 그 실행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다가 하얼빈에서 그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다시 버스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3시간을 달려 호텔에 도착하였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중국 연길을 거쳐 러시아 입국까지 길고 긴 첫날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홍범도와 안중근이 탔던 동청철도로 하얼빈에 가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하바롭스크, 우수리스크를 방문한 후(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 올린다) 포그라니치니 국경에서 국경 버스를 환승하여 중‧러 국경을 통과해 중국 흑룡강성 수분하로 들어갔다.
홍범도 부대가 오고 안중근 참모중장이 유동하와 함께 간 수분하(쑤이펀허)는 현재는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도시로 안중근 참모중장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하기 위해 동청철도를 타고 하얼빈으로 갔던 바로 그곳이다. 당시 수분하역이 있던 자리는 동청철도(중동철로)기념관으로 남아있어 그날의 역사 현장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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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하 신역사에서 안중근 참모중장이 유동하와 함께 갔던 동청철도 철로를 따라 하얼빈으로 갔다. 당시는 증기기관차였지만 우리는 고속열차를 타고 갔다. 수분하역을 14시 38분에 출발한 기차는 눈 덮인 만주벌판을 달려 17시 46분에 하얼빈역에 정확히 도착했다.
범도 루트 4기 때도 운이 좋았지만 이번 범도 루트 10기도 행운이었다. 내린 곳이 하얼빈역 2번 플랫폼. 바로 철로 건너편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현장이 보이는 자리였다. 우리는 떨리는 가슴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총! “백발백중! 일격필살!”
적의 수괴 하나를 처단한다고 일본이 물러가겠느냐고 했을 때 안중근 참모중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지요.”(<소설 범도> 2권) 이번 내란 사태를 겪으면서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남태령에서, 그리고 울산 롯데백화점 광장에 모여 함께 외치는 것도 우리가 홍범도고 안중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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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청철도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만주리와 수분하, 그리고 대련을 잇는 철도노선으로 1911년 중화민국이 설립한 뒤에는 중동철도로 불렸다. 러시아는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요동반도를 영유하는 것을 막은 대가로 청나라와 협상해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는다. 1898년 러시아는 여순과 대련 일대를 조차하고 하얼빈에서 대련에 이르는 남만주철도 부설권도 얻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지고 그에 따라 맺어진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장춘 이남의 남만주철도는 일본의 소유가 되었다. 이후 중화민국과 소련이 국교를 수교하면서 동청철도는 소련 소유가 되었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1932년 일본에 의해 괴뢰국인 만주국이 설립하자 소련은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려고 동청철도의 권리를 만주국 정부에 팔았다. 이 철도는 소련과 일본의 소유였다가 1949년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맹조약으로 현재 중국 소유가 되었다.
꼬리아 우라
안중근 참모중장은 1909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분하역에서 동청철도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아 3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3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비서와 하얼빈 총영사, 남만주철도 총재를 쏘아 3명을 척결하였다. 방현석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 영사는 침략의 선봉이었고 철도는 점과 점인 도시를 잇는 선이며 철도 총재는 그 침략야욕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안중근이 가진 브라우닝 권총은 7발이 장전되지만 6발을 사용 후 주변의 군인들이 체포하려고 하자 그는 마지막 남은 한발을 사용하지 않은 총을 던지고 하늘을 향해 “꼬리아 우라(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안중근 참모중장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군인의 자격으로 적의 수장을 처결한 것이므로 군사 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반도 침략의 전모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중근 참모중장이 재판을 받은 여순 일본관동법원과 수감생활을 하고 순국하신 여순감옥은 지난 6월 범도 루트 4기때 방문하였으며 지난 글에서 자세히 밝힌 바가 있다. 안중근 참모중장은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돼 심문과 재판을 받는 중에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비판하며 시정을 요구했고, 일본 관리 또한 그의 의로운 기개에 감복하여 특별히 우대하기도 하였다.
이후 재판은 비공개로 속전속결로 진행되었으며 사형 언도를 받고 감옥 안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집필 완성을 위해 사형집행을 연기 요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안타깝게 완성을 시키지 못하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3월 26일 순국하였다.
하얼빈에서 첫 밤을 보낸 후 일본군 만행의 현장 731부대 전시관을 관람하고 하얼빈역으로 돌아와 역사에 있는 안중근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안중근 장군의 생애를 알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으며 플랫폼 방향의 창을 통해 거사의 현장을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전시장 기획의 세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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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인가, 독립전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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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독립전쟁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한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했다고 말해도 되지만 안중근 참모중장으로 대표되는 독립군은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을 상대로 항일무장투쟁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아니고 안중근 장군이라고 우리가 불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안중근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썬 교육자였으며 군대 해산 등 나라가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의병을 일으켜 1908년에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함경북도로 진입해 경흥, 회령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한 의병장이며, 철학자이자 혁명가이고 진정한 군인이었다.
그가 남긴 많은 유묵들 중에서 마지막에 남긴 유묵은 ‘위국헌신 군인본분’이었다. 이 유묵은 사형장으로 가기 전 안중근의 인품에 감복한 일본인 간수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오늘날까지 여순감옥 간수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 간수의 후손들은 지금도 안중근 참모중장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중국과 러시아 땅이지만 연해주와 만주에서 펼쳐진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통해 우리 선조들이 불굴의 의지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려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바른 이름(정명)으로 부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가 아니고 안중근 장군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독립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4년에 불과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은 잘 알고 있으면서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40년 동안이나 지속된 피와 땀의 결과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번 범도 루트 역사 기행을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배성만 새로운 100년을 여는 통일의병 행정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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