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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천천히 자살하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40년을 가르치면서도, 막상 나는 겸손하지 못했다. 세상에 잘났다는 사람을 우습게 알고, 그래서 손해도 많이 봤다. 그런 나를 잘 아는 어느 선배가 더 머리를 숙이고 살라는 뜻으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1950~60년대 법조계에 고재호(1913~1991·사진)라는 어른이 계셨다. 대법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지냈으니 법조계에서 이룰 만큼 이룬 분이었다. 대법관으로 있던 1950년대 고향 전남 담양에 갈 일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대법관에게도 전용 차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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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까지 열차로 가서 시골 완행버스를 타고 다시 고향으로 가려면 버스 종점에서 내려 걸어서 개천을 건너야 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개천을 건너려는데 마침 젊은 순경이 보더니 기왕에 다 벗었으니 자기를 좀 업어 달라고 했다.
고 대법관이 1913년생이라 그 무렵에 40대 후반이었으므로 젊은 순경이 무례했거나 철딱서니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고 대법관은 아무 불평 없이 그 젊은이를 업어 개천을 건넜다. 고 재판관이 양말을 주섬주섬 신는데 순경이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다.
“건넛마을 고향 집에 갑니다.” “뉘 댁을 가시는지요.” “집안에 혼사가 있어 가는 길이라오.” “함자가 누구신지요.” “고재호올시다.” 그러자 그 순경은 꼬꾸라지듯이 놀라 엎어졌다. “고씨 댁에 서울에서 귀한 어른이 오시니 업어서 개천을 건너서 잘 모시고 오라”고 경찰서장이 보낸 인근 파출소 순경이었기 때문이다.
완장 차고 모자 큰 사람치고 겸손한 사람을 본 적이 드물다. 누군들 처음부터 교만하려고 작심했을까마는 그게 쉽지 않더라. “겸손이 영광보다 먼저이다.”(『구약성경』 잠언 15장 33절)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이래 신뢰 위기로 흔들리는 사법부를 보며 ‘참 어른’으로 존경받던 고재호 재판관이 더 그립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