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세 실천한 고재호 대법관

2025-02-12

“교만은 천천히 자살하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40년을 가르치면서도, 막상 나는 겸손하지 못했다. 세상에 잘났다는 사람을 우습게 알고, 그래서 손해도 많이 봤다. 그런 나를 잘 아는 어느 선배가 더 머리를 숙이고 살라는 뜻으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1950~60년대 법조계에 고재호(1913~1991·사진)라는 어른이 계셨다. 대법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지냈으니 법조계에서 이룰 만큼 이룬 분이었다. 대법관으로 있던 1950년대 고향 전남 담양에 갈 일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대법관에게도 전용 차량이 없었다.

광주까지 열차로 가서 시골 완행버스를 타고 다시 고향으로 가려면 버스 종점에서 내려 걸어서 개천을 건너야 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개천을 건너려는데 마침 젊은 순경이 보더니 기왕에 다 벗었으니 자기를 좀 업어 달라고 했다.

고 대법관이 1913년생이라 그 무렵에 40대 후반이었으므로 젊은 순경이 무례했거나 철딱서니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고 대법관은 아무 불평 없이 그 젊은이를 업어 개천을 건넜다. 고 재판관이 양말을 주섬주섬 신는데 순경이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다.

“건넛마을 고향 집에 갑니다.” “뉘 댁을 가시는지요.” “집안에 혼사가 있어 가는 길이라오.” “함자가 누구신지요.” “고재호올시다.” 그러자 그 순경은 꼬꾸라지듯이 놀라 엎어졌다. “고씨 댁에 서울에서 귀한 어른이 오시니 업어서 개천을 건너서 잘 모시고 오라”고 경찰서장이 보낸 인근 파출소 순경이었기 때문이다.

완장 차고 모자 큰 사람치고 겸손한 사람을 본 적이 드물다. 누군들 처음부터 교만하려고 작심했을까마는 그게 쉽지 않더라. “겸손이 영광보다 먼저이다.”(『구약성경』 잠언 15장 33절)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이래 신뢰 위기로 흔들리는 사법부를 보며 ‘참 어른’으로 존경받던 고재호 재판관이 더 그립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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