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룩후룩…운명적 입맞춤, 부산행 최고의 두 장면

2025-01-18

여행 중의 선택에는 당연히 성공과 실패가 있을 것 같았지만 부산은 좀 달랐다

1박2일 출장에 하루를 붙여 머물며 부산역과 서면역 인근,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 근처에서 걷고 사고 먹었다

오늘은 그중 충격적이었던 두 그릇의 국수에 대한 이야기다

첫 번째 충격은 기장 손칼국수였다. 서면시장에서 30여년을 지켜온 노포. 너무 유명한 집이라 설명이 더 필요할까 싶지만 이런 가게일수록 편견과 냉소를 접어두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미 너무 많은 정보와 말들이 범람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식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맛처럼 개인적인 체험이 또 있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첫 젓가락부터 충격적인 맛과 향과 질감이 있었다.

실은 전날 저녁도 국수였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오후 8시 반 즈음부터 서면역 인근을 배회하다 그럭저럭 괜찮은 국숫집에서 든든한 한 끼를 먹은 참이었다. 그랬는데 브런치로 칼국숫집을 찾는 건 아무리 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좀 부대끼는 일. 여차하면 기장 손칼국수 맞은편에 있는 하연정 순두부집에 갈 요량으로 서면시장을 찾은 것이었다. 하연정 순두부도 서면에서는 잔뼈가 굵은 밥집이었다. 두 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기장 손칼국수

손으로 뽑았어도 얇고 부드러운 면

멸치 육수에 쑥갓까지 곁들여 일품

도착했을 땐 이미 네 팀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줄 선 사람들 뒤로 하얗고 뽀얀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육수가 끓는 모양새가 그 연기의 풍요로움과 뭉근한 향으로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기 시작할 때, 몇 걸음 더 가까이서 보니 면을 다듬는 도마에서 밀가루 연기까지 구름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칼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장면을 외면할 수 있을까. 손으로 뽑은 칼국수면 옆에서 연신 끓고 있는 멸치 육수의 조합을?

이런 집은 회전이 빠르다. 앞선 세 팀은 5분 남짓 됐을 때 모두들 제 자리를 찾았다. 곧 차례가 되어 2인상으로 안내를 받아 칼국수 한 그릇과 김밥 한 줄을 주문했다. 사장님은 정갈하기 이를 데 없는 바지와 재킷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신사였는데, 주말이라 좋은 약속이 있으신 건지 매일 이런 차림인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점원 한 명 한 명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몸짓. 무척 빠르지만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 능숙함. 오래도록 손발을 맞춰 온 노하우가 홀에도 쌓여 있는 노포의 힘이었다.

칼국수와 김밥이 테이블 위에 놓이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국물 한 모금. 곧이어 국수 한 젓가락.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 이어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다시 국물 한 숟가락. 이후부터는 손짓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 열기가 식기 전에, 가장 맛있는 온도일 때 식사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내로라하는 손칼국수집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생겼던 불만은 이런 것이었다. 손으로 뽑은 면인 건 알겠는데 두께가 제각각이었다. 대체로 너무 두꺼웠다. 쫄깃하긴 한데 호로록 부드러운 ‘면스러움’은 약했다. 이로 면을 씹을 때의 두께감에도 모호한 면이 있었다. 여러 개의 얇은 면발을 한꺼번에 씹을 때의 즐거움과 면발 하나에 이가 박힐 때의 도톰한 질감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렸다. 나는 두터운 면에 이가 박히는 질감을 좋아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럴 거면 수제비를 먹지?

기장 손칼국수의 면은 부드럽고 얇은 쪽. 그래서 입술을 지날 때나 입속에서 씹을 때도 부담 없이 미끌거리는 촉감이 산뜻했다. 전날 밤 배부르게 국수를 먹은 사람이라도 다시 먹을 수 있는 질감인 셈인데 육수는 또 얼마나 담백하고 시원한지. 너무 오래 끓여서 비리거나 텁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은 첫 한 숟가락에 다 날아갔다. 여기에 특유의 양념장과 마늘, 고춧가루를 고르게 휘휘 섞고 푸짐하게 얹어놓은 쑥갓까지 곁들이면 입속에서 바다와 밭이 제각각 섞여 조화롭게 터지는 것 같았다.

칼국수는 6000원, 김밥은 2000원이다. 너무너무 맛있고 든든한데 저렴하기까지 하다. 이런 집이 동네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무실 옆에 있으면 매일 점심으로 먹어도 좋겠지. 좋은 식당 하나가 도시를 유일하게 만드는 법. 세상엔 멸치도 많고 밀가루도 많지만 이런 육수와 이런 면의 조합을 다른 도시에서 다시 찾기는 힘들 것 같았다.

두 번째 충격도 역시 면이었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부산에서 내린 사람이라면 반드시 여기서 한 끼를 해결하고 다음 일정에 오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러자면 몇 개의 유혹을 떨쳐야 한다. 부산역 인근에 있는 몇몇 돼지국밥집을 일단 지나야 한다. 횡단보도를 건너 차이나타운에 있는 마가만두나 신발원의 유혹에도 눈을 감아야 한다. 조금만 더 걸어 올라가면 100년을 넘어 4대째 운영 중인 평산옥의 질박한 간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평산옥

군더더기 없는 국수, ‘자신감’ 자체

수육과 함께 씹으면 일체감 ‘반짝’

평산옥에서는 돼지고기 수육과 국수를 판다. 수육은 1만원, 국수는 3000원, 여름에는 열무국수를 판다. 2024년 여름 열무국수의 가격은 4000원이었다. 메뉴가 적혀 있는 화이트보드에는 한 사람 앞에 한 접시의 수육은 주문해야 한다는 당부가 적혀 있다. 그러니까 겨울철 메뉴는 딱 둘뿐. 나머지는 술이다. 소주, 맥주, 생탁을 판다. 다녀온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생탁’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곁들였어야 했다. 한 잔이라도.

수육은 국내산 삼겹살과 앞다리살을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조각을 집어 들어도 끈적이지 않는다. 담백하지만 건조하지 않다. 지방이 붙어 있는 부위나 살코기나 다르지 않다. 입에 넣어도 마찬가지다. 돼지고기 특유의 향이 씹을 때마다 기분 좋게 우러나온다. 고루 탱탱하고 부드러워서 삼킬 때마다 기운이 솟는다. ‘좀 식었나’ 싶은데 고루고루 기분 좋게 씹히는 질감과 향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이 한 접시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수육과 밑반찬의 조합에는 100년의 세월이 묻어 있다. 평산옥에서는 지금까지 몇 번의 조합을 실험했을까. 지금 깔려 있는 이 반찬과 수육은 어떻게 먹어도 어울린다. 부추, 무채, 생마늘과 고추, 쌈장과 김치. 여기에 평산옥 특유의 양념장까지. 이런저런 조합들을 하나하나 먹다 보면 듬직하게 담겨 있던 수육 접시 바닥이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국수를 먹을 차례.

말간 국물에 하얀 소면이 전부인 이 솔직한 자태와 자신감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양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약간의 고춧가루와 파가 고명의 전부다. 구성이 심플하지만 맛은 단순치 않다. 수육을 한 점 씹다가 이 국물을 한 숟가락 들었을 땐 정수리 저 위에서 반짝하는 일체감이 있었다. 이 말간 국물은 분명 돼지로부터 온 것이라는 눅진하고 깊은 확신. 수육을 삶은 물에 직접 뽑은 국수를 말아 낸 것이었다.

특유의 다진 양념으로 국수 맛을 내는 가게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평산옥처럼 우직한 국수 한 그릇을 만났을 땐 감동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된다. 벼리고 벼린 것이다. 군더더기는 모조리 덜어낸 것이다. 다른 건 필요 없다는 확신과 자신감. 그래도 약간의 파와 고춧가루는 제 역할을 해낸다는 효율과 경험치. 본질과 본질이 만나면 이런 맛을 내고, 우리는 이미 100년도 넘는 동안 이 맛으로 대접해 왔다는 성실함이 이 한 그릇에 담겨 있는 것이다.

서울 모처에 앉아서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평산옥과 기장 손칼국수를 생각하면 어금니 저 안쪽에서 침이 배어 나온다. 올겨울이 끝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더 맛볼 수 있을까. 부산역에 얼른 내려 평산옥에만 들렀다 올라와도 내내 뿌듯하겠다. 그땐 꼭 생탁 한 잔을 곁들여야지. 가족과 나눠 먹을 어묵을 사고,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노곤하게 잠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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