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화국 초반인 1982년 6월3일 전두환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범석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은 메모지에 이런 구절을 남겼다. 이른바 ‘각하 지시 사항’의 일부인데 어음 부도 사건과 관련해 전 대통령이 “‘혹시’라는 의아심을 버려라. 걱정이 유언비어가 된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어음 부도 사건이란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5공 정권을 강타한 장영자·이철희 어음 사기 사건을 뜻한다. 세간에서 온갖 의혹 제기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행여라도 대통령 부부 등 최고 집권층이 연루됐을 것이란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는 다그침이 담겨 있다.

장영자씨는 1982년 남편 이철희씨와 함께 6400억원대 어음 사기 사건을 일으켜 징역 15년이 확정됐다. 부부는 당시 자금 사정이 나쁜 기업들에 접근해 현금을 빌려주고는 채권의 2~9배에 이르는 어음을 받아 이를 사채 시장에서 할인 판매하는 수법으로 거액을 챙겼다. 장씨가 바로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인 이규광 대한광업진흥공사(현 한국광물자원공사) 사장의 처제라는 점에서 이 여사 등 정권 최고위층이 장씨 뒤를 봐줬을 것이란 추측이 무성했다. 장씨 스스로 권력과 밀착돼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다녔다. 법원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자 “나는 권력 투쟁의 희생자”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장씨 부부 사건은 당대 최고의 수사기관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맡았다. 지금은 사라진 그 유명했던 ‘대검 중수부’다. 수사 결과 발표 직후 검찰총장과 중수부장, 심지어 수사에 관여한 평검사들까지 단체로 TV에 출연해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주고받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최고위층은 쏙 빠진 수사 결과에 많은 국민이 의구심을 표시하자 전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이뤄진 일이었다. 전 대통령이 수사 결과 발표 후 1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무려 세 차례나 개각을 단행할 만큼 정권의 위기감이 컸다. 이범석 장관이 외무부를 맡아 입각한 것도 이 개각의 일환이었다.

이제는 81세가 된 장씨가 최근 사기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된 사실이 18일 전해졌다. 1980년대의 어음 사기 사건까지 포함해 총 다섯 번째 실형 선고에 해당한다. 그간 범죄를 저질러 구속돼 구치소·교도소에 갇혀 지낸 기간만 33년인데 여기에 1년이 추가돼 34년으로 늘게 생겼다. 옛말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인간적으로 딱하기 그지없다. 한 번뿐인 인생의 약 40%에 해당하는 시간을 영어의 몸으로 보낸 셈 아닌가. 이번에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면 그때는 너무 고령이라 사기를 칠 기운조차 없을 것만 같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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