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전쟁이 빼앗은 정체성을 되찾는 여정
전쟁이 남긴 상처...소녀의 선택과 존엄
카트리나 나네스타드 장편소설, 2023 퀸즐랜드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서울=뉴스핌] 정태선 기자 = 전쟁은 총칼로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이름과 언어, 기억과 정체성까지 지워버린다.
카트리나 나네스타드의 청소년 역사소설 《코끼리한테 깔릴래, 곰한테 먹힐래?》(키멜리움, 352쪽, 1만7000원)는 제2차 세계대전기의 '레벤스보른(Lebensborn)' 프로그램에 희생된 아이들을 바탕에 두고, 한 소녀가 자기 자신을 되찾는 과정을 집요하게 비춘다. 이 작품은 출간 이후 호평을 받으며 2023년 퀸즐랜드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조피아는 폴란드의 평범한 여덟 살 소녀다. 금발과 파란 눈을 가졌다는 이유로 독일군에 납치돼 가족과 고향, 본래 이름을 잃는다. 독일화 과정을 거쳐 '소피아'로 다시 쓰인 그녀의 삶은 바이에른의 농가에서 시작된다. 새 부모의 보살핌은 따뜻하지만, 과거를 잊으라는 명령과 함께 온다.
소설은 이 잔인한 현실을 소녀의 눈높이에서 따라간다. 독일어만 쓰고, 새로운 출생 증명서를 받아든 아이는 점차 과거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처지의 폴란드 소년을 만나면서 균열이 생긴다. "나는 누구인가." 지워진 기억과 현재의 안온함 사이에서 조피아는 흔들리고, 마침내 스스로의 대답을 찾아야 하는 순간에 선다.

이 작품의 강점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 데 있다. 나네스타드는 선악을 흑백으로 가르지 않는다. 조피아를 입양한 독일 부모는 다정한 보호자이면서 동시에 체제의 공범이다. 인간은 착하면서도 이기적이고, 친절하면서도 잔인할 수 있다는 모순이 인물들의 일상 속에서 드러난다. 그 경계 위에서 소녀가 택해야 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이야기 전반을 관통하는 장치는 가족의 놀이 "하나를 골라!"다. "코끼리한테 깔릴래, 곰한테 먹힐래?"라는 말장난 같은 질문은 삶의 은유가 된다. 일상의 사소한 결정부터 운명을 바꾸는 기로까지, 선택은 늘 인간을 시험한다. 작가는 이 가혹한 선택을 경쾌한 문장과 맑은 시선으로 포착해 오히려 비극의 무게를 또렷하게 전한다.
배경이 된 레벤스보른은 '순수한 아리아인' 확대를 목표로 아이들을 선별·납치해 독일화하던 프로그램이었다. 인종적으로 '가치 있다'고 분류된 아이들은 이름과 생년월일까지 바꾸고 입양되었고, '탐탁지 못하다'고 낙인찍힌 아이들은 강제 수용소와 노예 노동, 더 참혹한 결말로 내몰렸다. 전쟁 후에도 많은 아이가 기록 속에서 사라졌고, 돌아간 이들조차 두 세계 사이에서 상실을 거듭했다.
《코끼리한테 깔릴래, 곰한테 먹힐래?》는 그 역사적 사실 위에 한 아이의 목소리를 세워 오늘의 독자에게 묻는다. 이름과 언어를 잃어도, 우리는 무엇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 청소년 독자에게는 성장의 이야기로, 성인에게는 기억과 윤리의 질문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지은이 카트리나 나네스타드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시골에서 자라 현재 빅토리아주의 언덕 마을에 산다. 가족과 우정, 소속감을 따뜻하게 그려 온 작가로, 역사적 비극을 아이의 시점에서 담아내며 폭넓은 독자층의 사랑을 받는다.
옮긴이 최호정은 서울대 미학과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을 거쳐 번역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역사·문학 번역으로 호평을 받아왔으며, 이번 역주에서는 소녀의 섬세한 감정과 시대의 무게를 균형 있게 살렸다.
windy@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