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가 패면 죽어라 빌었다고” 노태우, 3당 합당 결심한 사건

2025-05-21

노태우 비사

제3부. 노태우의 승부수 ‘3당 통합’

1회. 초유의 여소야대, 집권 두 달 만에 ‘정계개편론’

총선 참패한 노태우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자’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고 불과 두 달 만에 치러진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새 정권 출범 직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을 감안하자면 당연히 압승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민정당은 전체의석(299석)의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치는 125석에 그쳤다.

노태우 대통령은 운명론자다. 개표 결과를 보다가 새벽에 퇴근한 최병렬 정무수석은 눈을 붙이자마자 울려대는 청와대 직통전화에 벌떡 일어났다. 새벽 6시. 대통령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렇게 된 것도 다 하늘의 뜻으로 알고 겸허히 받아들입시다.”

최병렬은 사표를 품고 다음 날 아침 9시 홍성철 비서실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 “죄송합니다”라는 사과의 말에 대통령은 애써 미소를 머금으면서 “밤들 새우셨겠군요. 고생 많았습니다”라며 재차 ‘하늘의 뜻’임을 강조했다. 사표는 반려됐다.

헌정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했다. 1987년 개헌으로 국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됐다. 국회가 정부 업무를 일일이 들여다볼 수 있는 국정감사권이 부활했다. 국회 소집 요건이 재적 3분의 1에서 4분의 1로 완화되고, 개회기간 제한(연 150일)도 없어졌다. 국회법 개정으로 청문회가 도입되고, TV 생중계도 가능해졌다.

결정적으로 대통령이 국회를 견제할 수 있는 국회해산권이 없어졌다. 야당이 마음대로 국회 청문회를 열고 생중계하는 정치공세를 계속해도 대통령은 속수무책이게 됐다. 이전까지 국회가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떠받치는 ‘시녀’ 역할을 해왔다면, 이젠 반대로 대통령이 국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엄청난 정치적 전환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대통령이 ‘운명’이라며 문책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나름의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철언 “어차피 정계개편하면 된다”

총선 참패를 확인한 1988년 4월 27일 아침 일찍 노태우 대통령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박철언 정책보좌관이었다. 박철언은 중요한 일이 있으면 늘 아침 일찍이나 저녁 늦게 청와대로 올라가 대통령을 따로 만났다. ‘운명’이라고 말은 했지만 내심 대통령은 심기가 불편했다. 압승을 예상했던 최병렬 등 관계자들의 보고에 대해 ‘모두 엉터리’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박철언이 다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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