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다녀올 일이 있어 참새보다 일찍 일어난 금요일이었다. 공항 가는 첫 버스를 놓치고 서둘러 택시를 탔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드는데 기사님이 백미러로 보며 듣고 싶은 음악 있으면 말하라고, 틀어주겠다 하셨다. 마침 앱으로 클래식 FM을 열려던 차여서 그 채널을 켜주실 수 있을지 여쭈었다. 기사님은 시계를 보시더니 <출발 FM과 함께>가 시작될 시각 아니냐 하셨다. “(진행자가) 사람 참 재밌고 좋은데 좀 시끌벅적해서. 맨날 청취자 퀴즈를 내고 말이죠.”
내가 쿡 웃자, 이 계절엔 하프시코드 연주가 제격이라며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틀어주셨다. “어때요, 내 선곡이 라디오 피디보다 낫죠?” “그렇네요. 좋은데요!” 맞장구쳤다. 그러자 어서 신청곡을 달라고, 우리 손님 덕분에 새로운 것 좀 들어보자며 재촉하셨다. 음악 애호가인 듯한 기사님께 무엇을 말씀드려야 ‘새로운 것’이 될지 자신 없어 머뭇머뭇하다, 당장 떠오르는 대로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마테르(슬픔의 성모)’를 골랐다. “페르골… ‘돌’ 말고, 골짜기 할 때의 ‘골’이요. 도레미 할 때의 ‘레’고요.”
그렇게 유튜브 검색창 위쪽에 올라온 음반을 재생했다. 두세 곡까지 듣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청량한 아침 시간대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선율 같아서. 전곡 모음이라, 단조로우면서도 장중한 듀엣 성악곡 열몇편이 연이어 흐를 텐데 나 때문에 중도에 끄지 못하고 억지로 들으시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유사한 계열의 고음악 중 이보다 환한 선율을 지닌, 샤르팡티에의 ‘테데움’으로 바꿔 듣자 청할지 어쩔지 고민하던 차에 기사님이 말씀하셨다. “이건 뭐랄까. 청중 말고 주교 앞에서, 주교한테 아부하려고 부르는 노래 같은데?”
순간 웃음이 빵 터지면서 우려 또한 풍선 터지듯 펑 사라졌다. 죽어가는 아들 앞에 선 어머니의 ‘날카로운 칼이 뚫고 지나간’ 내면을 옮겨낸 노랫말. 요절한 음악가가 병상에서 ‘엄마’를 그리며 작곡했다고 전승되는 그 곡. 그걸 주교님한테 아부하는 톤이라 다르게 상상하면 마냥 침통하게만 들리진 않을 듯했다. 그 시점부턴 나도 전전긍긍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 주교가 아니라 하느님 들으시라고 부르는 것 같네.” 공항에 도착할 무렵 기사님은 수정된 감상평을 들려주셨다. “덕분에 오늘 내가 좋은 음악 새로 알았어요.” 주정차 제한 구역이라 “저도 고맙습니다”라고만 한 채 서둘러 내렸지만, 탑승 수속 도중 택시 앱을 열어 메시지를 남겼다. 노래 같이 들어주셔서 감사했다고. 이어폰으로 혼자 들을 때보다 열 배 좋았다고.
부서진 마음을 누일 데가 달리 없던 생의 시기가 있었다. 길에 서서 울다 무턱대고 택시에 올랐고, 명동성당 가달라고 한 후 다시 울었다. 기사님은 뒷좌석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듣던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의 볼륨을 줄이고 치지직 주파수를 돌렸다.
여기저기 자동차 클랙슨 울리던 월요일 밤 퇴계로 인근의 택시 안에서 그렇게 ‘아베 마리아’와 ‘살베 레지나’를 들었다. 시간이 흘러 무얼로 그리 힘들었는지마저 잊은 후에도 그 기억은 남았다. 이후 신문 지면을 얻어 올린 첫 글에 썼다. 울고 있는 낯선 승객을 위해 ‘재미있는 라디오’를 희생하고 성모의 노래를 함께 들어준 이의 마음에 대하여. 어떤 위로는 예상 못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물처럼 스미고 깃털처럼 닿는다.
기내에 오르며 청했다. 기사님이 오늘 장거리 손님 태우고 섬을 즐겁게 횡단하시기를. 주차할 때 단숨에 멋지게 ‘오라이~’ 하시기를. 좁은 마을 길 지날 적엔 느림보 버스가 가로막지 않아 붕붕 다니시기를. 같은 시각, 나 또한 기사님의 청원 안에 머물러 있었던 걸까. 비행기가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솜사탕 같은 구름 사이로 사뿐사뿐 날았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