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에 반발하는 탄핵 집회가 평일에도 이어지는 가운데 이른바 ‘젠지’(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10대 후반~20대 초중반 세대)가 새로운 집회 문화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과격한 구호나 운동가요 대신 로제의 ‘아파트’, 에스파의 ‘위플래시’ 등 아이돌 가요를 떼창하며 축제 같은 집회·시위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지난 9일 오후 7시 30분쯤 국회의사당 역 앞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는 약 70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중 ‘과잠(소속 대학과 학과 등이 표시된 점퍼)’을 입은 대학생 등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은 절반 정도였다. 이들 대다수는 똑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 대신 개성과 감정을 담아 집회‧시위 도구를 직접 만들었다.
깃발과 촛불 사이로 집회 현장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싸리 빗자루를 높게 치켜든 오다온(22)씨는 “다 쓸어버리겠단 의미로 촛불 대신 들고 나왔다. 여기 들고나오려고 일부러 다이소에서 5000원 주고 빗자루를 샀다”며 “시험 기간이라 여기 나오기 전에 과제를 끝내려고 사흘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오씨뿐 아니라 주변엔 파리채나 아이돌 응원 도구, 직접 만든 집회 도구 등을 흔드는 이들이 많았다. 유명 캐릭터를 이용한 피켓도 눈에 띄었다. 대학생인 이모(22)씨와 2명의 친구는 고양이를 의인화한 유명 캐릭터인 ‘헬로키티’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욕설하는 이미지를 응원봉과 나무젓가락, 부채에 각각 붙여 들고 나왔다. 이씨는 “한 번에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사진이라고 생각해 골랐다”며 “‘엑스(X)’에 돌아다니는 ‘짤’을 보고 함게 뽑아오기로 약속해 들고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도에서 온 박모(20대)씨는 유명한 만화영화 ‘카드캡터체리’ 속 주인공의 요술봉을 들었다. 그는 “세상에 재앙을 하나씩 해결하는 체리처럼 ‘이것이 정의다’라고 말하고 싶어 원래부터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소품을 가져온 것”이라고 말했다.
쉽게 구겨지는 종이 재질의 손피켓 대신 태블릿PC를 이용한 이른바 ‘디지털 피켓’을 든 시민도 있었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4마리 사진에 ‘집사가 츄르먹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라는 문구를 아이패드에 띄워 온 민지원(20)씨다. 민씨는 “정치에 관심 없었지만 이번 계엄 선포를 보고 나라가 망해가는 걸 느껴 집회에 나오게 됐다”며 “종이로 뽑으면 구겨지고 잘 안 보일까 봐 아이패드 화면 밝기를 높여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지나가면서 고양이 귀엽다는 응원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SNS를 통해 유행 ‘짤’ 등 피켓이나 깃발에 쓸 이미지를 공유하거나 함께 집회에 참석할 ‘파티원’을 구하기도 했다. 시위에 참석한 ‘X’ 이용자들은 실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나가서 깃발 흔듭시다’ ‘다 같이 좋은 세상 만들어봐요’ 등 글을 올려 집회 참여를 독려했다.
전문가들은 교과서뿐 아니라 영화나 유튜브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민주주의 위기를 접했던 Z세대들이 일상에서 직접 계엄을 마주하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것이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를 촉발했다고 본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천만 관객 영화 ‘서울의 봄’을 본 젊은 세대들이 영화에서만 보던 계엄을 직접 경험하면서 충격이 컸을 것”이라며 “서울의 봄이 나오기 전 비상계엄이었다면 젊은 세대 반응이 이렇게 폭발적이진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변화한 집회 양상에 대해선 개인의 개성과 감정을 중요시하는 Z세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에 나선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응원봉이나 자신만의 피켓을 이용해 집회에 참여하는 건 집회에서도 남들과 다른 자신을 표현하겠다는 태도”라며 “젠지들이 자기표현의 진화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도 “과거 세대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적 감수성을 가진 Z세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무거운 분위기가 아닌 축제와 같은 분위기의 집회를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