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공에서 야당 원톱으로···절체절명 위기 넘고 세 번째 도전 ‘어대명’ 완성

2025-06-03

안동 7남매 중 다섯째로 출생

12세 때 소년공 생활 시작

기계에 왼쪽 팔뚝 찍혀 ‘장애’

‘검정고시’ 중앙대 법대 입학

노무현 영향에 인권변호사로

시민운동 한계에 정치 입문

“겨울이 깊었던 만큼, 봄은 더 따뜻할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4월10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이같이 말했다. 12·3 불법계엄 사태를 돌파해온 국민을 응원한 말이었지만, 험난한 정치 여정을 버텨온 본인을 향한 언사로도 해석됐다.

이 당선인은 회고록 <결국 국민이 합니다>에 “내 인생은 위기가 아닌 때가 없었다”고 적었다. 곤궁한 유년기를 거쳐 소년공으로 일하다 장애를 얻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 ‘정치인 이재명’의 삶도 탄탄대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남시장과 경기지사 등 굵직한 직을 맡았으나 주로 당내 비주류에 머물렀다. 확고부동한 당내 입지를 확보한 뒤에도 구 여권의 집중 공격과 사법 리스크에 시달렸다.

불법계엄 사태는 극적인 전환점이 됐다. 그는 군경 투입까지 이어진 헌정 위기 상황을 돌파하며 대세 주자로 섰다. 헌정 질서 회복을 바라는 지지자들의 염원을 바탕으로 세 번째 도전 만에 21대 대선에서 승리했다.

■ 12세 소년공…변호사 되다

이 당선인은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 마을에서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64년 12월22일생으로 기록돼 있지만, 실제로는 1963년 10월생이라고 한다.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 성남시의 낙후지역이었던 상대원동으로 이주했다. 중학교 진학은 포기했다. 12세에 동마고무에서 소년공 생활을 시작했다. 함석판을 접고 자르며 100군데 넘는 흉터를 얻었다. 사장이 야반도주해 돈 한 푼 받지 못한 일도 있었다. 구타도 종종 당했다.

가혹한 노동은 장애로 이어졌다.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프레스에 왼쪽 팔뚝이 찍혀 6급 지체장애 판정을 받았다. 이 사고로 왼팔이 굽어 군 입대도 하지 못했다.

공부를 택한 건 이런 환경에서 탈출하려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공장일과 공부를 병행해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1982년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노동법·기본권 학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일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듣고 인권변호사의 뜻을 굳혔다고 알려져 있다.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1994년 성남시민모임(성남참여연대) 창립을 주도했다.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 제기, 파크뷰 특혜 분양 의혹 제기를 이끌었다. 파크뷰 사건을 취재하던 KBS 프로듀서가 검사를 사칭해 김병량 당시 성남시장을 취재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이 일로 2003년 7월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다.

■ 지역 행정에서 중앙 정치로

정치의 길로 들어선 데는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운동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시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꾸겠다’며 정치 입문을 결심했다고 한다.

정치 입문 뒤 지방선거와 총선에 도전해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2010년 성남시장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성남시립의료원을 착공하는 등 취임 즉시 광폭 행보에 나섰다.

2014년 재선 성남시장일 때는 기본소득과 유사한 청년배당, 중학생 대상 무상교복 지원 등을 시정에 도입했다. SNS를 적극 활용하며 직접 소통에 공을 들이는 방식도 이때 갖춰졌다. 당시 결성된 지지자 모임 ‘손가락혁명군’은 현재까지 그의 핵심 지지 세력으로 불린다.

중앙 정치권의 주목이 뒤따랐다.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성남시 등 경기도 6개 지방자치단체의 세입 5000억원을 다른 지자체에 배분하기로 하자 11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해 10월 ‘박근혜·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자 대통령 사퇴를 공개 주장했다. 제도권 정치인으론 처음이었다.

2017년 19대 대선 더불어민주당 경선에 참여하며 처음으로 대선에 도전했다. 문재인(57.0%)·안희정(21.5%) 후보에 이어 3위(21.2%)를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반문재인(반문) 이미지가 굳어졌다.

2018년 경기지사 민주당 경선에서도 친문재인(친문)계와 부딪혔다. 본선에서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형수 욕설 논란’ 등으로 곤욕을 치렀다.

경기지사 당선 후에는 선거 토론 중 “셋째 형 정신병원 입원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한 부분 등이 문제가 돼 허위사실 공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기소됐다. 이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 두 번의 대선 도전, 연이은 고배

경기지사 시절 코로나19 확산 국면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전체 도민 1인당 지역화폐 10만원의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했고,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 시설을 강제 봉쇄했다. 문재인 정부의 재난지원금 선별 지급을 비판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기본소득이 그의 정책 상징으로 굳어졌다.

생활 속 불법관행을 뿌리 뽑는 작업에도 중점을 뒀다. 특별사법경찰단의 직무범위를 확대해 불법 고리 사채, 불량식품 제조·유통 등 불법적인 관행을 개선했다. 계곡 내 불법 점유시설물 정비 계획을 공표하고 시행 1년도 되지 않아 불법업소 96%를 정비한 것도 이때 나온 성과다.

성남시장 재선 ‘이름’ 알리고

경기지사 되며 ‘중량급’ 성장

지난 대선서 윤석열에 석패

곧장 국회 입성 후 당권 장악

‘꼬리표’ 사법 리스크 벗어나

‘내란 심판’ 앞세워 고공 행진

경기지사로서 보인 성과들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2021년 민주당 20대 대선 경선 후보로 선출됐다. 경선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국무총리 출신인 이낙연 후보와 맞대결하며 크게 갈등했다. 당시 경선 과정에서 제기된 대장동 이슈는 아직도 이 당선인을 따라다니고 있다.

‘0선’ 대선 후보들끼리 맞붙은 본선도 녹록지 않았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등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네거티브 공방이 과열되면서 역대 최악의 비호감 대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법 리스크로 인해 높아진 이 당선인의 비호감도는 대선에서 0.73%포인트 차이로 패한 핵심 원인으로 꼽힌다.

■ 윤석열 정부 강력 견제

대선 패배 두 달 만인 2022년 6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국회의원이 된 건 처음이었다. 그해 8월 민주당 대표가 됐고, 22대 총선을 통해 당을 확실히 장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천 과정에서 비이재명(비명)계가 대거 탈락해 일명 ‘비명횡사’ 논란이 일었다. 이후 당을 일극 체제로 만들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이 당선인이 대표로 재임하던 시절, 민주당은 거대 야당의 국회 운영 주도권을 활용해 윤석열 정부를 강력하게 견제했다. 확고한 당내 세력과 정부 견제 능력을 바탕으로 그해 8월 대표 연임에 성공했다.

이 당선인이 이끈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30차례 국무위원 등의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 발의 등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지난해 12월엔 헌정사상 최초로 야당의 감액안만이 반영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정치 실종에 대한 공동 책임을 지적하는 목소리와 독단적 국정운영을 막아냈다는 목소리가 엇갈린다.

사법 리스크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 당선인은 지난해 6월 쌍방울 불법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해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1월에는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돼 잠시 숨을 돌렸지만 사법 리스크의 완전한 해소는 멀어 보였다.

■ 불법계엄 해제 주도

12·3 불법계엄은 이 당선인의 정치 인생에 극적인 반전을 불러왔다. 그는 국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켜고 시민들에게 “지금 국회로 와달라”고 호소했다. 국회 의원회관 뒤편 담을 넘어 국회에 진입했고, 소속 의원들을 신속히 본회의장으로 불러 모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당선인은 계엄이 해제된 뒤 즉시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추진했다. 불법계엄 사태 나흘 만인 지난해 12월7일 첫 표결에 나섰으나 국민의힘의 집단 불참에 따라 정족수(200명) 미달로 실패했다. 일주일 뒤인 12월14일 재차 시도해 가결을 이끌어냈다. 그는 가결 직후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와 이 나라의 미래를 지켜내겠다”고 말했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에도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경호처의 ‘철통 방어’ 속에 윤 전 대통령이 체포·구속됐으나, 서울중앙지법이 그의 구속을 취소하며 정국은 또 한 번 출렁였다.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탄핵심판도 장기화됐다. 이 당선인은 거리로 나가 광화문광장에 천막 당사를 설치하고 도보 행진 등 당의 장외 투쟁을 주도했다.

■ 사법 리스크 털고 대선 승리

불법 비상계엄으로부터 4개월이 지난 4월10일, 이 당선인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윤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유리한 고지에서 대선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 안팎에선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이란 구호가 등장했다.

대선 가도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며 사법 리스크가 다시 떠오른 것이다. 정치권에선 그의 파기환송심이 대선 전 열려 후보직 박탈이 이뤄질 가능성과, 당선돼도 재판이 이어질 가능성 등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민주당은 법원의 판결이 정치 개입이라며 법관 탄핵까지 거론, 혼란은 한층 심화됐다.

이 당선인의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혼란은 법원이 그의 재판 일정을 대선 뒤로 모두 미루며 일단락됐다. 이 당선인의 공직선거법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지난달 15일로 잡혀있던 첫 공판기일을 오는 18일로 변경했고, 대장동·위례·백현동·성남FC 사건 재판부도 기존에 잡혀있던 일정을 모두 오는 24일로 미뤘다. 위증교사 혐의 사건 항소심 재판은 기약 없이 연기됐다. 이 당선인의 대통령 임기 중 재판이 이뤄질지는 논란으로 남아 있다.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난 이 당선인은 본격화된 정국에서 내란 종식과 민생 회복을 모토로 높은 지지율을 이어갔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민주당의 ‘삼권 장악’ 우려나 이 당선인의 ‘호텔경제학’ 발언 등을 고리로 막판 공세를 벌였으나, 판을 흔들 정도로 표심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계엄 이후부터 이어져온 이재명 대세론은 대선 승리로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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