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기 대선 캠페인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닷새 뒤면 정권 인수위원회 없이 곧바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윤석열 정부의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총력전에 비해 새로 들어서는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 일본은 변화 가능성을 주시해 왔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을 계승할 가능성이 크지만, 윤 정부의 대일 정책을 비판해온 더불어민주당이 집권 한다면 복원된 경제·안보 분야의 양국 협력과 활성화된 민간 교류가 문재인 정부 시절로 되돌아가거나, 자신들이 원치 않는 역사(과거사) 문제를 대면해야 한다는 우려를 일본은 품고 있다. 실제 민주당은 공약집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추구한다”면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존엄을 지키고 역사 인식 제고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혀 집권 시 따질 건 따지겠다는 기조의 정책 노선 변화를 예고했다.
기존 안보 질서의 변화 예고
한·일 긴밀 공조해 대응해야
전 국민적 합의 도출이 필수
역사문제가 제약 돼선 안 돼
일본의 우려, 자초한 측면 커

그러나 과연 일본은 이런 우려를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은 강제 징용 피해자에게 지급해야 할 배상금을 지원재단 등 제3자가 변제하는 결정과 시행에서 일본의 호응을 요구했다. 일본이 ‘성의 있는 호응’에 응했더라면 제3자 변제는 훨씬 수월하게 진행됐을 것이다. 또 일본이 한국 국민의 감정을 고려했다면 한국의 ‘양보’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도광산 자료의 전시와 추도식에서 진정성 있는 접근에 나섰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은 오히려 우리 국민의 반발을 감수한 윤 정부의 결단과 추진을 한껏 활용해 자국의 실리를 챙기며 교조화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런 일본이 이제 와서 한국의 새 정부 출범 이후 한·일 관계 퇴행을 우려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스스로 이런 국면을 초래한 측면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우려와 별개로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한·일 관계가 퇴행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우선, 국제 질서 변화의 엄중성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은 국제 안보·경제 질서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을 재현하기 위해 미국 중심주의를 내건 트럼프의 거센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 관세 정책에 따른 통상 마찰이 확대되고 있으며,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과 관련해 동북아 안보 지형이 변화하고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에 따른 안보 위협이 증대하고 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진전돼 온 북·러 밀착이 북한의 파병으로 이어져 기존 안보 질서의 틀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양국 공조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역사 문제로 인해 한·일 관계가 퇴행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 방향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국민의 소리’가 한·일 관계의 건강한 미래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소리는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표층의 소리’와 마음속으로 희망하는 ‘심층의 소리’가 있다. 한·일 역사 문제를 둘러싸고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에서는 서로 다른 소리가 표층에서 부딪히며 갈등과 대립의 양상을 보였다. 한편, 심층의 소리가 형성되어 간 측면도 있다. 한·일 갈등으로 국민이 분열해선 안 된다는 소리, 이해 단체의 이익을 위해 국민감정을 이용하지 말라는 소리, 정치인이 역사 문제로 진영간 갈등을 증폭시키지 말라는 소리가 대표적이다. 나아가 문재인 정부 때 ‘지체된 화해’나 윤석열 정부의 ‘강요된 화해’를 넘어 한·일 화해를 향해 전진하라는 주문도 심층에서 울려 온다. 국민 화합과 한·일 화해를 지향하라는 심층의 소리는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자들을 위한 준엄한 명령이다. 정치 지도자는 표층과 심층의 소리를 구별하고 심층에서 울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정치적 판단을 하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줄 배상금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변제금 마련에 어려움이 있지만 제3자 변제는 이미 상당히 진행됐다. 그토록 반대하던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 측도 제3자 변제를 수용했다. 어찌 그들에게 여한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제금을 수용하면서 이제는 역사 화해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그들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아울러 소송을 제기하지 못했지만 구제를 호소하는 많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염원 또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가 심층의 소리에 기반하여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표층의 소리에 편향돼 권력을 사용하게 된다면 지난 두 정부 때처럼 난국에 직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다행스러운 것은 민주당 내에서도 입장 변화가 읽힌다는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외교 책사로 활동하고 있는 위성락 의원은 지난달 27일 일본 지지통신(時事通信)과의 인터뷰에서 “제3자 변제의 보완이 필요하다”며 “동시에 역사 문제가 현재나 미래의 협력을 제약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한·일 관계 진전시키려면
그렇다면 한·일 협력을 제약하지 않으면서 국민감정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보완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국민 화합을 이루고 한·일 화해를 진전시키는 방안이어야 하고, 일본의 호응을 담아내는 방안이어야 할 것이다. ‘문희상 법안’를 다시 생각해 보자.
2019년 한·일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은 국민 화합과 한·일 화해를 위해 소위 ‘문희상 법안’을 발의했다. 한국과 일본의 기업과 개인으로부터 자발적 기부금을 마련하여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을 지급하자는 게 골자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지원재단)이 2020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산하 단체 59곳 가운데 89.8%(53곳)가 찬성한다는 의견을 냈던 묘수다. 아베 신조 총리조차 이를 수용할 뜻을 밝혔지만 20대 국회 종료로 자동폐기 됐다. 이제 그 방안을 다시 꺼낼 때가 됐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주요 국가에 특사를 파견할 것이다. 일본 특사로는 문희상 법안을 꿰뚫고 있는 김진표 전 국회의장을 제안한다. 아베 총리가 그랬듯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가 이를 수용하도록 한다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하는 멋진 이벤트가 될 것이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