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세종시와 훈민정음기념사업회가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하는 대규모 기념탑 건립을 검토하고 있다. 세종시에 따르면 금강유역의 국립박물관단지 인근 문화공원 용지에 들어설 기념탑은 지상 28층 108m 높이의 한옥 목탑 형태가 유력하다. 28층은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 28자, 108m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어제 서문의 108자를 뜻한다. 8각형 평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집필한 8명의 학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시는 기념탑과 함께 주변 부지를 한글문화도시를 상징하는 장소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2028년(예정) 완공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조건축물이 된다.
건립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제각각이나 부정적 의견이 만만치 않다. 전시행정이라는 비판, 800억 원 가량이 소요된다는 예산 문제도 있지만 디자인도 문제다. 공개된 예상 이미지를 보면 제한된 높이에 지붕을 28단이나 올린 모습이 기괴한 느낌을 준다. 지네 같은 절지동물마저 연상케 한다. 상징성을 포기할 수 없다면 28이란 숫자를 다른 곳에 활용할 수는 없을까. 왠지 슬럼화되어 흉가체험 콘텐츠에 등장하는 전국의 수많은 장소가 떠오른다.
목탑으로 짓는 이유도 불분명하다. 세종시 측은 창제가 조선시대에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당대 주류 양식이었던 목조 한옥을 세우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글은 세계 문자 중 손에 꼽히는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 현 시대와 조응하지 않는 목조 기념탑은 이를 기념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다. 훈민정음 창제를 알리고 싶다면 현대 가장 선진적이라 생각되는 양식을 적용해야 한다. 물론 그 양식은 일시적 트렌드가 아니라 오랜 생명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계획 자체가 철회되지 않는다면 발전적으로 개선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기념물로 어울리는 형태는 어떤 것일까. 수직・수평・사선・원형으로 된 훈민정음에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처럼 형태 파악이 어려운 비정형 건축보다 명료한 매스를 지닌 건축이 어울린다. 자소를 활용하는 것도 좋지만 자소를 단순 뻥튀기한 수준의 1차원적 해석으로는 안 된다. 해체 후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매향리(Maehyangri), 박물관(Museum), 기념(Memorial)을 상징하는 알파벳 M을 음파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매향리 평화기념관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자의 유려한 곡선과 훈민정음의 모던함이 조화를 이룬 훈민정음 해례본의 판면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은 어떨지도 생각해 본다.
재료의 물성을 외관에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좋다. 문자가 널리 쓰이려면 그 자체도 중요하나 활자와 인쇄 시설처럼 이를 대량으로 구현할 수 있는 인프라의 역할이 크다. 일찍이 조선 태종은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주조했으며 세종 대에도 훈민정음 창제를 전후하여 경자자, 갑인자와 함께 한글 금속활자가 주조되어 ‘동국정운’(1448) 등에 쓰였다. 이 시기 활자는 주로 구리를 주성분으로 만들어졌고 활자 주조에는 목판과 점토가 활용됐다. 모두 재해석하여 적용할 수 있는 요소다.
예로 든 방향은 세종시와 훈민정음기념사업회의 계획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예시가 최선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무의미한 디자인보다 현대 건축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개성 있는 모습으로 들어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목적도 훈민정음뿐 아니라 디지털 한글디자인 관련 자료까지 수집・전시하고 작업을 지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장으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시대와 괴리된 기념탑 건립은 예산 낭비 사례 목록에 최신 사례를 하나 추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한동훈 기자
bong@bizhankook.com
[핫클릭]
· [디자인 와이너리] 다음의 새 로고, 다름을 버린 다음은 어떻게 될까
· [디자인 와이너리] 탄핵의 'ㅌ'이 북한 서체라고? 팩트체크
· [디자인 와이너리] "그렇게 다 덮어버려야 속이 후련했냐" 신세계스퀘어
· [디자인 와이너리]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재규어 리브랜딩
· [디자인 와이너리] 화장품 회사가 만든 '노크 만년필'의 새로운 문법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