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가상자산 시장이 몇 년 사이 10배 넘게 성장했지만 법적 환경은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가상자산 시장에 대한 정치권의 몰이해와 무관심 때문이다. 같은 시기 옆나라 일본은 제도화·합법화·금융화를 통해 코인 시장을 품겠다고 한다. 우리가 주도하던 코인 시장도 일본에 뒤처질 판이다.
지난해 우리 국민이 보유한 가상자산 규모는 100조원을 돌파했다.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을 통해 국내 5대 거래소(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고팍스)에 받아낸 자료다. 투자자 수는 1000만명에 육박(966만명)한다. 중복으로 집계했음을 감안해도 성인 인구의 상당수가 시장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 의원은 이 숫자가 어디에 필요해서 집계했을까. 그가 지난해 10월 발의한 법안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상자산 개인 지갑 신고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이 법안이 시행되면 개인 지갑 보유자는 이름, 주소 등 신원정보와 보유한 가상자산의 잔액 합산 금액을 당국에 매년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한다. 투자 과정에서 수백개 개인지갑을 만드는 업계 특성상 현실성 없는 안이다. 투자자들은 이를 "개인지갑의 거래 내역까지 다 들여다본 뒤 차후 과세에 써먹겠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였다.
여당인 국민의힘에서 가상자산 시장 참여자들을 위한 법적 환경 구축에 긍정적인 법안을 내놓긴 했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그것이다. 하지만 기민한 대응이라는 평가를 내려주긴 힘들다. 국민의힘은 이 법안을 지난달 17일에야 발의했다. 민주당이 비트코인을 외환보유고에 편입하자는 발언이 나온 정책 논의를 한 지 10일 이상이 지나서다.
민주당이 시장을 통제하고 세금을 걷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면, 국민의힘은 가상자산 자체에 별생각이 없어 보인다. 양당 모두 1000만명에 육박하는 투자자는 유권자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국민들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가 우리보다 더 소극적이었던 일본은 오히려 정부와 정치권에서 더 적극적이다. 일본은 가상자산을 제도권 금융 일부로 정착시키기 위한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금융청은 가상자산을 금융상품으로 분류하고, 현행법에 가상자산 규제를 포함하려 움직이고 있다. 법 개정이 완료되면 가상자산은 주식, 채권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되고 내부자 거래 금지 등 투자자 보호 장치도 마련된다. 가상자산 정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관련 사업을 추진할 수 없는 우리보다 한참 앞서가고 있다.
비트코인은 만들어진 지 15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미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실체가 없다', '폰지 사기다'라는 등의 비아냥이 무색하게 개당 가격이 1억원을 넘어선 지 한참 됐다. 전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자국을 가상자산 수도로 만들겠다고 공언했고, 세계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제롬 파월도 비트코인을 '디지털 금'으로 인정했다. 수경(京)원을 굴리는 자산운용사 블랙록 최고경영자(CEO) 래리 핑크도 비슷하게 말했다. 미국에선 비트코인의 전략적 준비자산을 논의하는 마당에 실체 유무와 사기 여부를 따지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다.
트럼프가 가상자산에 군침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공언대로 미국이 가상자산 수도가 된다면 막대한 자금이 흘러들어올 것이고, 이는 미국의 부(富)를 한층 늘려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가상자산이 뭔지 제대로 된 정의도 하기 전에 세금부터 뜯으려는 근시안적인 우리 정치권의 시각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 정부도 최근 법인의 가상자산 투자를 일부 허용한 점은 긍정적이지만, 그것으론 충분치 않다. 가상자산 시장의 건강한 성장을 위한 법적 환경 구축을 서둘지 않는다면 미국은 물론, 한 발 뒤에 있던 일본에까지 뒤처질 판이다. 아, 그 전에 가상자산의 자산적 특성부터 인정하고 법적 정의부터 명확히 하는 게 우선이다. ‘통제’와 ‘과세’는 그 뒤에 고려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