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미국은 해양 패권을 나눌 생각이 없다. 중국과의 해군력 경쟁에 열을 올리고, 그들보다 더 많은 배를 만들고자 한다. 의지는 있지만 능력은 없다. 그 능력을 가진 나라가 한국이다. 미국이 K조선의 핵심 고객으로 급부상한 배경이다. 존 펠란 미 해군성 장관이 취임하자마자 한국 조선소를 찾은 것도 그래서다. 미·중의 패권 다툼 속에서 K조선에 찾아든 기회다.
한국은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한국 조선업의 대부’로 불리는 신동식(93) 한국해사기술 회장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적임자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초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하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그때 한국 조선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6년의 공직 생활 후엔 조선업계로 돌아가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 선박 2000여 종을 설계했다. 구순이 넘은 현재도 인도 정부에 조언하는 등 글로벌 조선업계에서 최고령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신 회장을 만나 K조선의 과제와 미래 전략을 들어봤다.
미국이 K조선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에 태평양함대 사령관, 미국 해군 장관이 한국 조선소를 일제히 방문했다. 올해엔 트럼프 정부 들어 임명된 해군성 장관이 제일 처음 한 일이 한국 조선소를 찾은 거다. 다들 별생각 없이 왔다가 한국 조선소 건조 능력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돌아갔다. 미국 고위급들이 잇따라 한국 조선소를 방문한 건 상당히 의미가 크다. 그들이 가장 부활시키고 싶은 조선 산업을 우리가 가졌기 때문이다.”

미 해군 정보국 등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함정 건조 능력은 2024년 기준으로 10만t인 데 반해 중국은 2325만t으로, 중국은 미국보다 232배의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함정 수도 2020년(미국 293척, 중국 350척)에 이미 추월당했다. 미국 내에서는 한국 등 동맹국에서 선박을 건조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신 회장은 “‘우리가 세계 최고의 기술력으로 가성비 높은 함정을 만들 수 있다’고 트럼프 정부와 협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조선 기술력이 세계 최고라지만 중국의 추격이 매섭다.
“양으로는 중국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 중국은 해외 수주 없이 내수만으로도 조선소를 운영할 수 있다. 우리는 고부가가치 선박에 강하다. 중국은 평균 5000만 달러 수준에서 수주하지만 우리 조선사들은 척당 1억5000만~2억 달러에 달하는 고부가가치 선박을 수주한다. 가장 비싼 배 중 하나인 메탄올 추진 선박은 척당 4000억원이 넘는다. 이 시장에선 한국이 100% 수주하고 있다.”
한국 조선산업 기틀 마련한 산증인
박정희 정부 경제개발 5개년 수립 후
조선업계 돌아가 선박 2000종 설계
구순에도 인도 자문 등 왕성한 활동

중국과 격차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은 초(超)격차다. 시장을 선도하는 선구자 역할을 해야 앞서갈 수 있다. 국내 조선소들과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메탄올 선박에 이어 암모니아, 수소, SMR(소형모듈원자로) 등 차세대 선박 연료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있다. 최근엔 자율주행선박에 대한 실증 운항을 했는데 결과가 아주 만족스럽다고 들었다. 이런 부분을 바탕으로 조선업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중국과의 기술력 격차는 당분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긴 침체기를 뚫고 조선업에 기회가 왔다. 이걸 잘 살려야 할 텐데.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다. 100년을 준비하는 해양전략국가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 196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 의지에 따라 내가 청사진을 그렸다. 정주영 회장 같은 기업인들이 실행에 옮겼다. 문 닫으려던 스코틀랜드의 조선소를 인수해 선진 조선 기술을 배웠다. 현재 국내 조선업은 산학연 삼박자를 다 갖췄다. 훌륭한 인재도 있고, 세계 최고의 시설을 가지고 있다. 기술력은 세계 최고다. 심지어 미국이라는 세계 제일의 고객을 잡을 기회까지 열렸다. 그런데 아쉬운 건 정책 의지다. 좋은 기회가 찾아왔지만 전 정권의 대통령은 의지가 결여돼 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새로운 대통령의 리더십이다. 한국 조선 산업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겠다는 안목을 가진 대통령의 리더십이 가장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지.
“대통령의 리더십을 실행할 수 있는 정부 조직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세계 최고의 조선업을 이끌고 있는 우리나라엔 조선업 담당 부서가 산업통상자원부에 있는 조선해양플랜트과다. 60년대에는 대통령 직속으로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당시 9개 부처 장관들이 위원들이었다. 인허가로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업이 단기간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조직이 산업화 초기에 뼈대를 만든 것처럼 앞으로 100년 조선업 발전을 위한 특별 기구 설립이 꼭 필요하다.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

신 회장은 대통령 직속으로 해양전략기획위원회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 간 칸막이로 흩어져 있는 조선-해운-항만 정책을 통합해 행정을 일원화해 추진해야만 미래의 조선 산업을 선도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 조선사들의 해외 진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번 호주 군함 입찰에서 국내 업체끼리 경쟁하다 제대로 입찰도 못 넣은 일이 벌어졌다. 더 이상 이런 출혈 경쟁은 안 된다. ‘K조선 원팀’으로 나가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아진다. 일본만 해도 선박 건조 능력이 아직 우수하다. 언제든 우리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있다. 다행히 최근 캐나다의 잠수함 프로젝트엔 (한국 기업들이) 공동 입찰서를 냈다고 하더라. 이런 걸 조율할 조직이 필요하다.”
국내 조선업 인력 부족과 유출이 심각하다.
“오늘의 조선업이 가능했던 건 훌륭한 인재가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 조선소를 만들면서 교육 훈련원도 함께 만들어서 인력을 키웠다. 지금은 한국 조선업이 외국인 인력에 의지하고 있다. 특히 앞으로는 설계와 연구개발 등의 기술 인력을 중점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군 인력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해군사관학교에서 우수 생도를 선발해 대학에 위탁 교육을 보냈고 미국에 유학 보내 박사 학위까지 마치게 했다. 그런데 요즘은 해사 출신 인재들이 대령이 되면 전역 후 조선소에서 1~2년 조함 담당 이사로 일하다 그만둔다. 국내에 일자리가 없어 이들이 중국 조선소로 취업하는 건 엄청난 국력 손실이다. 인력 관리까지 포함해 정부가 조선업 신산업 정책의 마스터플랜을 세워야 한다.”
원팀 K조선 위해 ‘대통령 특별기구’를
함정 건조능력 부족한 미국서 러브콜
우리 기술력 최고지만 중 추격 매서워
정부가 연구개발 인력 육성·관리해야
최근엔 중국에 이어 인도도 조선업을 키우려 한다.
“인도는 2047년까지 상선을 2500척으로 늘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세운 게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다. 모디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에 관심이 많았고 배우고 싶어 한다. KDI(한국개발연구원) 요청으로 인도 기업인 대상 강연을 한 게 인연이 됐다. 세계적인 조선소를 짓고 싶다고 인도로 나를 초청했고, 한국도 여러 번 방문해 조선소를 다녀갔다. 지난해에도 다녀갔다. 이번에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에서 인도가 미국 천연가스를 사주기로 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배도 수백 척 필요할 거다.”
인도의 조선굴기가 우리나라에도 도움이 될지.
“인도 정부의 계획을 보면 세계 최대 규모로 조선소를 짓는 게 목표다. 조선소 배후에 신도시를 조성하고, 조선업 인재를 양성할 대학도 세우면서 여태껏 없는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짓겠다면서 개념 설계를 해서 나한테 검토해 달라며 찾아왔다. 이게 추진된다면 우리가 인도에 필요한 기자재도 팔 수 있고, 유대 관계도 생기고, 인도에서 필요한 선박 일부도 한국에 발주할 것이다. 인도 프로젝트에도 정부가 관심을 가지고 진행한다면 또 다른 기회가 열릴 거라고 본다. 인도를 현시점에서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신동식=1932년생으로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를 졸업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대통령 정무비서관, 초대 경제수석, 대통령 직속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공직에서 나온 이후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해 한국 최초의 민간 선박 설계·건조감리 업체를 경영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