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학 시절부터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가면 처음엔 어려워도 결국엔 승리를 쟁취한다’는 신념이 아주 강했다고 한다. 사법시험 9수 합격, 스타 검사, 검찰총장을 거쳐 대통령 자리에 오르며 자기 확신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는 현실과 담을 쌓고 자기만의 망상 세계를 구축했다. 반국가 세력인 국회가 패악질을 일삼고, 선관위가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좌파 언론이 자기 지지율을 실제보다 낮게 보도하는 ‘윤석열 유니버스’ 말이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 확신에 빠져 불통과 독선을 남발하는 사람이 어떻게 수많은 정치적 경쟁자를 잇따라 물리치고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을 수 있었을까? 윤 대통령이 바보 혹은 미치광이라는 세간의 평이 맞다면, 대선에서 그를 찍은 지지자들은 양두구육에 모조리 속았다는 말일까?
살면서 우리는 서로 목표가 엇갈리는 갈등 상황에 놓인다. 예를 들어 물건 값을 깎거나, 첫눈에 반한 이성에게 들이대거나, 상대와 한판 대결을 벌인다. 옛말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고 했으니, 언뜻 생각하면 사회관계에서 나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최대한 정확히 파악하도록 우리의 마음이 진화했을 듯하다.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수백건의 연구는 우리가 자신의 외모, 건강, 지능, 공정함, 유능함, 리더십, 일관성 등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함을 밝혀냈다. 또한 나 자신은 기막힌 행운을 타고났다고 믿는다. 솔직히 터놓고 말하자. 우리 대부분은 나 자신이 평균적인 사람보다 더 좋은 직장을 얻고, 더 잘난 아이를 낳고, 더 오래 건강하게 살리라고 믿는다. 내가 사고, 범죄, 질병, 원치 않는 임신, 지진을 당할 확률은 평균에 비해 더 낮다고 믿는다. 대학 교수들을 설문 조사한 어느 연구에 따르면, 자신을 평균보다 더 나은 교수로 여긴다고 답한 비율이 무려 96%였다. 한마디로, 윤 대통령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과잉 확신(overconfidence)에 빠져 있다.
왜 우리는 나 자신을 속일까? 왜 진심으로 내 능력과 올바름을 과대평가할까? 1976년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가 그 해답을 제시했다. 만약 내가 실은 빈털터리임을 잘 알면서도 매력적인 이성에게 마치 억만장자인 양 허세를 부린다고 하자. 이에 맞서서 상대방은 내 속임수를 정교하게 간파하는 능력을 진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잘 속이려면 나부터 먼저 속여야 한다. 내가 억만장자임을 진심으로 믿으면서 이성에게 접근한다면, 상대방 이성에게 내가 빈털터리라는 사실이 부지불식간에 새어 나갈 가능성이 낮아진다. 즉 인간은 소위 ‘뻥카’를 잘 치기 위해서 자기 자신부터 먼저 속이도록 진화했다.
영장류학자 리처드 랭엄은 과잉 확신은 단순한 판단 착오나 미치광이의 말기적 증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게 아니라, 과잉 확신은 전쟁, 스포츠, 기업 경쟁처럼 양자가 격돌하는 상황에서 허세를 더 잘 부려서 경쟁력을 높이게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선택된 심리적 적응이라는 것이다. 모두 다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누구도 허세를 부리지 않는 가상의 상태를 상상해 보자. 각자의 전력이 투명하게 공개된다. 내가 상대보다 더 강할 때에만 공격을 개시하고, 상대는 즉시 항복을 선언한다. 결과적으로 착취 행위는 무수히 많이 벌어지지만, 지루하고 소모적인 전쟁은 드물게 일어난다.
그러나 이처럼 정직하고 합리적인 개체들은 허세에 능하고 자기 능력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개체들로 빠르게 대체된다. 과잉 확신에 빠진 이들은 서로 전력의 차이가 꽤 벌어져도 각자 자신이 승리할 확률이 실제보다 더 높다고 믿기 때문에 소모적인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군사 역사학자들은 대다수 전쟁에서 지도자는 망상에 가까울 만큼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양측의 지도자들은 단 몇주 안에 대승을 거두리라 예측했다. 1864년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이었던 존 세지윅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남군의 총알이 코끼리도 맞히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총에 맞고 전사했다.
말할 필요 없이, 과학은 과잉 확신에 빠진 지도자가 저지른 내란 범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내란 사태를 어느 미치광이가 터뜨린 예외적 일탈로 치부하기보다는, 과잉 확신이라는 본능이 어떻게 일국의 지도자가 파멸의 길을 선택하게 했는지 세심한 과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