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서 찍은 프랑스 영화가 건네는 위로...“나도 모르는 내 감정 알아가는 순간 그렸다”

2025-11-26

눈 내린 아침, 오토바이를 탄 커플이 익숙한 풍경을 질주한다. 바다와 산, 아파트가 어우러져 있는 강원도 속초다. 26일 개봉한 가무라 고야 감독의 프랑스 영화 ‘속초에서의 겨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의 초반부는 속초의 해변과 시장 풍경으로 채워지며, 한국인 배우들이 한국어로 대사를 한다. 이 영화가 프랑스 작품으로 분류된 이유는 뭘까. 영화는 커플 중 한 명인 수하(벨라 킴)를 비추며 이유를 밝혀나간다.

수하는 시장에서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지내며 작은 펜션에서 근무한다. 그러다 펜션 손님으로 프랑스인 얀 케랑(로쉬디 젬)을 맞게 된다. 이전까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던 수하의 입에서 능숙한 프랑스어가 튀어나온다. “Bonjour, bienvenue au ‘Blue House’. auriez-vous une réservation?”(안녕하세요, ‘푸른 집’(펜션 이름)에 잘 오셨어요. 예약은 하셨나요?)

알고 보니 수하는 속초 태생의 한국-프랑스 혼혈인.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프랑스인 아버지를 알고 싶어 프랑스어를 배워둔 것이다. 수하는 얀을 알아가며 자신의 혼혈 정체성을 마주한다. ‘속초에서의 겨울’이 프랑스 영화가 된 이유다.

영화는 한국-프랑스 혼혈인 스위스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의 동명소설 『속초에서의 겨울(Hiverà Sokcho)』(2016)을 원작으로 한다. 이 소설은 작가가 스물 세 살에 자신의 경험을 담아 쓴 첫 작품으로, 공개 직후 국내외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발표된 해엔 스위스 신인 작가에 수여하는 로버트 발저 상을, 2021년엔 스위스 작가 최초로 전미도서상 번역 문학 부문 최고 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지난해 토론토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첫 상영을 했다.

뒤사팽은 지난 22일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나는 스위스, 프랑스, 한국을 오가며 성장했다. 여러 경험을 통해 어디서든 외국인같았던 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과 반대되는, 한국에서 태어나 유럽을 잘 모르는 혼혈인 수하의 이야기를 쓰며 “나 또한 ‘진짜 한국인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보고 싶었다”고 집필 계기를 전했다.

여러 장소 중 속초가 소설의 배경이 된 이유는, 뒤사팽이 속초의 해변에서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변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비슷한 듯 다른 두 장소를 연결하며 뒤사팽은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했다.

그는 2011년 늦가을 처음으로 찾은 속초를 “북한 인근의 경계 지역이자, 관광지인데도 비어있는 듯한 비수기의 분위기가 (나에게) 강렬히 남은 곳”이라고 표현하며 “나의 상처와 연결의 모든 면을 지닌 장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경계인으로서의 수하가 느끼는 내면의 혼란을 중점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수하가 신체를 인식하고 주변과 관계 맺는 방식과도 연결돼있다. 뒤사팽이 혼혈로서의 감각을 알고 있는 프랑스계 일본인 가무라 감독에게 영화 작업을 맡긴 이유다.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중앙일보와 만난 가무라 감독은 “소설을 읽고 수하의 많은 부분에 나를 비춰볼 수 있었다”며 “작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수하를 연기한 벨라 킴 역시 경계인의 감각을 깊이 공감하고 있는 배우였다. 킴은 한국인이지만, 어릴 적 속초에서 살았던 경험과 프랑스에서 살았던 경험을 모두 가지고 두 나라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영화에서 수하의 혼란스러운 감정은 줄곧 인서트 컷(Insert Cut, 특정 장면의 중요한 부분이나 세부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끼워 넣는 짧은 이미지)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다. 특히 극 중반의 수하가 욕실 속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는 시퀀스는 감독이 신경 써서 넣은 부분이다.

수하는 민박집에서 줄곧 그림 작업에 몰두하는 얀을 떠올리며 욕실의 붓을 잡고, 붓으로 자신의 몸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이전까지 타인의 기준으로만 자신을 보던 수하는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후 나오는 애니메이션 역시 자유로이 흐르기 시작한 수하의 내면을 표현한다.

가무라 감독은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소설과 달리, 영화에선 관객에게 인물의 감정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며 “추상적이기도 하고, 정형화되기 어려운 ‘나도 모르는 내 감정’을 수하가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애니메이션 삽입의 이유를 밝혔다.

영화는 경계인의 감정과 함께 외모·관계 등의 측면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어떤 압박감을 주고 있는지도 들여다봤다. “여자는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가꿔야 한다”고 말하는 등 수하에게 사회적 편견을 답습하는 수하의 엄마가 대표적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나아가며 위로를 전한다.

이 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느냐 묻자, 킴은 “누구나 인생에서 흔들리는 진자(振子) 같을 때가 있지 않나. 내가 겪은 한국은 ‘좋은 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였다. 프랑스는 대신 ‘좋은 질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였다. 이 영화가 누군가에게 (삶에 대한) 좋은 질문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전했다. 12세 이상 관람가. 1시간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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