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현 대통령제, 한계 드러나… 분권형 바꿔 권력 분산을” [2025 신년특집-1945년생 해방둥이의 광복 80년]

2024-12-31

한국 가장 큰 쾌거는 민주주의

타인 향한 적개심이 퇴보시켜

남·북한 통일 반드시 이뤄지길

다섯 번의 투옥과 10년6개월의 옥살이, 7년간 이어진 수배생활, 끔찍했던 고문…. 1960년 4·19혁명에서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젊음을 온통 민주화운동에 쏟은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올해 만 80세가 된다. 머리는 하얗게 셌지만, 대한민국의 쾌거를 꼽아 달란 질문에 “민주주의지!”라고 외치고, 미래 세대에게 “일상의 민주주의”를 당부하는 그는 여전히 뜨거운 민주주의자다. 그런 그에게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는 “그동안 이뤄온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권위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이사장은 이번 사태를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해 한국 민주주의를 더욱 민주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윤 대통령 탄핵소추 3일 뒤인 지난 17일 경기 의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청사에서 진행됐다.

이 이사장은 음력으로 1945년 1월, 광복 6개월 전에 태어났다. 엄혹했던 독재 정권 시절엔 재야의 민주투사로, 민주화 이후엔 개혁파 정치인으로 80년 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에게 일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으니 ‘4·19혁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불의에 항거하는 열기가 뜨거웠던 4·19혁명 직후, 경북 영양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이 이사장은 학교 교장이 교육감에 의해 부당 전보발령을 당하자 영양군 내 중·고등학생을 모아 전근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 이사장은 그 일로 경찰에 붙잡혀 20일 동안 유치장에 갇혔다. 생애 첫 데모, 첫 감옥살이였다. 이 경험은 인생의 방향타가 돼 그를 30년에 걸친 험난한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그게 내 인생의 전기(轉機)가 된 거야. 유치장에서 민주주의라는 것도 생각해 보고, 좋은 정치라는 것도 생각해 보고…. 그때 생각이 내 일생을 관통한 거지.”

이 이사장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이후에도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놓지 않았다. 정치권에서 그는 ‘개헌 전도사’로 불렸다. 2010년 이명박정부 특임장관을 맡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논의에 불을 붙였고, ‘개헌 후 조기퇴진’ 공약을 내걸며 18·19대 대선에 출사표를 내기도 했다.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이 집중된 현 ‘제왕적 대통령제’에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이사장은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함정으로 설명했다. “지금의 대통령제에선 어떤 대통령이든 불행해질 수밖에 없고, 물리적 통치 방법에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장마철에 홍수가 나도, 비가 안 와 논바닥이 갈라져도 다 대통령 책임이 되는데, 권력은 있으니 정국이 마음대로 안 되면 힘을 써야겠단 생각이 드는 거죠.” 이 이사장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은 외교·통일·국방 등 외치를 담당하고, 내치는 각 정당의 의석 비율에 따라 구성된 거국내각이 책임지는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하면 대통령 권한을 분산할 수 있고, 여야가 국정의 공동 책임자가 돼 진영 갈등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이 개헌할 적기”라고 강조했다.

12·3 비상계엄이 그에게 남긴 고민거리는 또 있다. 한국이 제도적으로 민주화됐어도 ‘일상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윤 대통령과 비상계엄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이 충암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충암중·고교 등굣길에 계란이 던져지는 등 학생들이 위협을 당한 일을 예로 들었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나요. ‘충암’자만 들어가면 아주 원수처럼 생각하는 거잖아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없고 적개심과 분노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거야. 이것만 보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30∼40년 뒤로 돌아간 거지.” 그는 미래 세대를 향해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혼자가 아닌 남들과 더불어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이사장은 20년 후 광복 100년이 됐을 땐 남한과 북한이 자유 왕래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길 소망했다. 광복절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도 ‘민족 통일’을 마지막까지 외친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을 꼽았다. ‘젊은 세대가 통일에 관심이 없지 않으냐’라는 지적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1민족 1국가 1체제가 어렵다면, 연합국가 형태로라도 통일이 돼야 합니다. 분단된 민족의 꿈은 통일입니다. 나라가 100년 동안 분단돼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의왕=김병관 기자 gwan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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