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대기업과 함께 기술을 개발하고 성능을 평가할 수 있는 ‘미니 팹’ 사업이 올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동안 “웨이퍼 구경하기도 힘들다”며 대기업과의 협력에 어려움을 호소했던 소부장 기업들이 이제는 시제품 분석부터 양산 테스트까지 미니 팹에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29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의 착공과 함께 ‘트리니티 팹’ 공사도 막이 올랐다. 팹의 이름은 정부, 칩 제조 기업, 소부장 기업이 삼위일체(Trinity)가 돼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의미를 담아 지었다. 지난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제출한 ‘첨단반도체 양산연계형 미니 팹 기반 구축사업 예비타당성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트리니티 팹의 규모는 3300㎡ 면적의 11층 높이의 단일 층 클린룸으로 구성된다. 운영 시점은 2027년 5월 목표다.
클린룸 내부에는 노광·식각·확산·증착·세정 등 반도체 5대 공정별 장비와 극미세 공정에서 발생 가능한 오류를 잡아내는 계측 장비 등 40대가량의 장비가 들어선다. 12인치 웨이퍼 기반으로 최대 1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 수준을 지원할 예정이다.
“대기업에 왜 정부 돈 지원?” 시각도

트리니티팹 사업의 최종 사업비는 4469억원이다. 당초 기획보고서에서 추산한 총 사업비는 9060억원으로 국고에서 3930억원, 경기도·용인시 등 지방자치단체가 730억원, SK하이닉스가 4400억원을 분담하는 식이었다. 문영환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부연구위원은 “사업비 산출 근거의 대부분이 영업 비밀에 해당해 적정 금액 추정이 어려워서, 민자 부담금은 총 사업비 산출에서 빠졌다”라고 설명했다. 사업비에 포함되지 않지만, 건물을 짓고 시설을 구축하는 데 들어가는 수천억 원의 비용은 SK하이닉스가 대부분 부담한다.
소부장의 숙원 사업이지만, 사업 예타 과정에서 일부 의견 대립도 있었다고 한다. 예비 타당성 조사 과정에 참여했던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예타 과정에서 왜 재벌 기업에 정부 돈을 지원해줘야 하느냐는 반발이 제기됐다”라며 “어차피 대기업 시설이고, 이 팹을 쓰는 소부장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납품하면 결국 대기업만 좋은 일 아니냐는 시각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반도체 제조 생태계가 성장하려면 소부장 기업 지원이 절실하다는 데 의견이 모이면서 예타를 통과했다. 특히 과학기술적 타당성에서 평가자 12명이 만장일치로 사업 시행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27년에 트리니티 팹이 오픈되면 소부장 업체들의 성장 기반이 될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소부장 분야의 중소·중견 기업들이 성능을 입증할 수 있는 데이터를 뽑고 싶어도, 시험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시설이 없어 영업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노종합기술원 등 공공 팹 기관도 있지만, 양산 경험이 없는 연구시설에서 얻은 데이터는 영업에 한계가 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제조 생태계 자체는 크지만 소부장의 기반이 매우 취약해 대기업과 소부장 간 협력이 절실했다”라며 “대기업으로선 팹 부지도 제공하고, 보안 우려 등 신경 쓸 사안이 많겠지만, 소부장 기업들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