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퇴근하고 커트를 예약한 미용실을 찾았다. 앞 순서 고객 머리 손질이 안 끝나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40대 전후 남성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며 들어왔다. 직원이 입을 뗐다. “예약하셨나요?” “아뇨.” “저희가 예약제라 예약을 안 하셨으면 이용이 어려우세요.” “간단한 손질도 안 될까요?” 어색한 극존대 표현을 써가며 난색을 보이는 직원과 남성의 불편한 대치가 이어졌다. 그는 마지못해 미용사 명함을 챙기고 미용실을 나섰다. 힘든 거동으로 돌아가는 그를 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요즘 미용실은 대부분 예약제인데 왜 예약도 안 하고 왔을까?’

이 기억이 되살아난 건 최근 소셜미디어 스레드에 올라온 한 글을 읽고 나서였다. 미용실을 운영한다는 작성자는 “며칠 전 어느 노인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우물쭈물하고 계셔서 나가봤다”며 “‘예약을 안 했는데 머리 못하겠죠? 죄송해요’라고 하시는데 손도 떨고, 너무 주눅 들어 계셨다”고 썼다. 작성자는 노인에게 파마를 해줬고, 노인은 감사를 전했다고 한다.(작성자와 사업장 운영 방침이 다를 뿐 내가 찾았던 미용실 직원의 응대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으니 오해가 없길 바란다)
예약제는 편리하다. 고객 입장에선 원하는 서비스를 정해진 시간에 받을 수 있어서 좋고, 공급자 입장에선 사업장을 공백 없이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 합리적이다. 스마트폰 사용률이 98%(한국갤럽조사연구소, 2024)에 달하는 한국에선 온라인 예약을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으니 간편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예약제에 적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간극이 점점 더 벌어진다는 거다. 두 부류가 누리는 효용의 차이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약제라는 컨베이어 벨트가 차질 없이 돌아갈 수 있게 그 장치에 안착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달리 말하면 어떤 이유로든 그 컨베이어 벨트의 작동을 지체시킨 이와의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날 미용실 예약을 하지 않아서(혹은 못해서) 발걸음을 돌린 남성을 보며 그의 사정을 헤아려보기도 전에 불편함을 느낀 내가 섬뜩하게 느껴진 이유다.
예약제가 주는 빈틈없는 편리함에 길들수록 그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게을리하게 된다. 그런 시스템이 공고해진다는 건 문밖에서 손을 떨며 우물쭈물하는 이가 늘어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해 탐구한 책 『이타주의자 선언』에서 “이타적 마음이란 꼭 무언가를 해주려는 동기일 필요는 없다”고, “그저 소나무처럼 그 자리에 있어 주는 마음”이라고 했다. 시스템 앞에서 주눅 들고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