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러시아가 못사는 이유 ①

2025-09-01

# 앞서가는 서양의 민주주의와 뒤늦은 러시아의 농노해방

필자는 상당히 오래전 교육부·한국학술재단의 공모과제인 ‘독일 통일’(獨逸統一)에 출원하여 어려운 경쟁을 뚫고 국가 대표 격으로 선발된 적이 있다. 이로써 독일통일에 대한 현지에서의 연구(3개월간, 체재비·연구비·왕복 항공료 수혜)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이로 인해 모스크바, 베를린, 동독에 다녀올 수 있는 행운을 안게 된 것이다.

이 무렵 모스크바를 방문 중이던 김영삼 대통령은 “러시아가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침입을 막아낸 위대한 나라”라고 했으며,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지금 상황과는 매우 다르게 한국이 러시아의 동반자임을 강조하면서 김 대통령을 극진히 대우했다.

필자는 이제 러시아 방문 중에 실재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왜 러시아가 민주화 이전에 그리도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본다.

낙후된 러시아와 선진의 서유럽을 잘 비교할 수 있도록 가장 먼저 정치적인 면에서 민주화를 이루었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최초로 공업화를 이룬 영국과 프랑스의 예를 살펴본다.

영국에서는 이미 존(John) 왕 치하의 무거운 세금과 포악한 정치에 항거해 얻어낸 신민(臣民)의 제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대헌장(大憲章, Magna Charta)’이 1215년에 승인되었다.

이어 헨리 8세로 대표되는 영국의 튜더(Tudor) 왕조가 끝난 뒤 뒤를 이은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Stuart) 왕조의 왕이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장해 “왕을 비판하는 것은 하느님을 비판하는 것”이라 하여 독재와 부당한 과세를 일삼은 결과 내란 중에 찰스1세가 크롬웰(Cromwell)에 의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후 18년 동안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된 공화정이 탄생했다.

그 뒤 왕정복고 시절에 제임스(James) 2세의 독재와 가톨릭 정치가 되살아나게 되자 영국국교회는 왕의 사위인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William III of Orange)을 신왕으로 추대해 백성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권리장전(權利章典)’, 즉 인권선언을 승인하도록 함으로써 역사상 유명한 ‘무혈의 명예혁명’이 이루어졌고(1688).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로부터 약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프랑스에서는 전체 인구의 1.5%인 귀족 35만 명과 15만 명 사제들의 특권을 파괴한 노동자·농민이 아닌 시민이 중심이 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그런데 혁명은 국민의 희망을 쉽게 충족시켜 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인접국들의 대불동맹을 야기했고, 루이 16세의 망명 시도와 체포, 그에 따른 왕 부처의 처형을 계기로 마침내 과격 일변도로 치닫게 되었다. 1793년에 제정된 프랑스 헌법은 권력분할, 자유, 평등 면에서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역사상 비참하기로 유명한 1854년의 ‘크리미아(Crimea) 전쟁’에서 영·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 러시아는 크게 당황했고, 늦게나마 황제 알렉산더 2세는 암울했던 니콜라이 시대의 경찰·검열 제도를 청산하고, 서양의 자유·정치 이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어 황제 알렉산더 2세는 프러시아의 개혁을 본보기로 삼아 1861년 초 매우 늦은 시점에 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500만 명의 농노를 추가로 해방시켜 자유의 몸이 되게 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할 수 있었고, 주군의 허락 없이 결혼할 수 있었으며, 영주재판권이 국가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된 농민들은 그 뒤 수십 년 동안 종속적인 농노의 성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규하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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