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나자 영화가 왔다 [왕겅우 회고록 (19)]

2025-11-14

영웅적 승리에 관한 이 보도들이 전에 읽은 대중소설들과 합쳐져 나중에 나를 이상한 골목길로 끌어들이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나는 영화와 만났다. 전쟁 중에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우리 도시의 다섯 개 영화관으로 쏟아져 들어와 번득이는 이미지의 향연을 펼쳤다. 영화산업의 회복에 시간이 필요했던 중국과 영국의 영화는 많지 않았다.

미국에서 온 수백 편 영화는 포장이 잘 되어 있었고 내가 읽은 영국 소설을 각색한 것들도 있었다. 그 영화들이 내 상상력을 끌어들인 데는 내 마음속의 환상의 세계가 한몫했다. 대중소설 읽기와 전쟁 속 현실 인간에 관한 비밀라디오 청취가 합쳐져 빚어낸 환상의 세계였다. 나는 나만의 이 세계에 집착하며 1945년 일본 항복에서 1947년 중국행 출발 사이의 20개월 동안 영화를 한 편이라도 더 보려고 발 벗고 나섰다. 그 기간에 4백 편 넘는 영화를 봤다니, 스스로도 믿기 어렵다. 대개 영어로 된 영화였고 기억할 필요가 없는 영화들이었다.

그 많은 수의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상영 날짜가 이틀을 별로 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작품은 주말에 돌려서 많은 관객을 모았다. 다른 영화들은 손님이 몇 안 될 때가 많았다. 제일 처음 들어온 것은 1941년 이전에 만들어진 괜찮은 영화 중에서 뽑은 것이었다. 좋은 작품이 많아서 나를 더 많이 오게 끌어들였다.

그 뒤에 1940-46년 기간의 영화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군 병사들의 오락용이나 사기 앙양을 위한 것들이 있었고, 병영과 전선의 힘든 모습을 통해 후방 국민에게 미군과 연합군의 훌륭한 역할을 알려주는 것들이 있었다. 선전용이 분명하고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많은데도, 나는 3년간 사막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빠져들었다.

이 집착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아직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 전쟁 끝날 때가 내 감수성이 예민하던 나이와 겹쳐졌기 때문일 수 있다. 도서관에서 소설에 빠져 지내고 비밀라디오의 승리 방송에 흥분할 때였다. 두 갈래 자극이 꼬리를 물고 내 일상을 뒤덮으면서 영어로 된 나만의 세상을 빚어내었다. 아버지의 엄격한 중국어 공부방과 대척점에 있는 세상이었다. 한쪽에서는 늘 심각한 의무감을 앞세우는데 다른 한쪽은 즐겁고 분방했다.

평화가 오자 즐거움 쪽이 힘을 얻었다. 지난 3년간 생활이 얼마나 위축되어 있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던 나는 쌓여 있는 박탈감을 어떻게 채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9월에 앤더슨학교에 돌아가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머지않아 중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고 나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영화관의 어두움은 내게 손짓을 계속했다. 또 하나 미지와 불확실의 세계로 넘어가기 전에 자기네가 보여주는 상상의 세계를 최대한 즐기라는 듯이.

상황이 웬만큼 안정된 1945년 말이 되자 전쟁 중 제작된 영화 중 일품으로 알려진 것들을 모두 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일어났다. 미군 해병대가 태평양 일대에서 일본군 물리치는 뉴스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과달카날, 웨이크, 미드웨이 등지의 전투를 담은 영화를 보고 싶었다. 진주만 습격 이후의 전개를 그린 영화들도 있었고 미 공군의 일본 폭격을 보여주는 영화들도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전쟁과 나치 독일의 항복, 그리고 전쟁이 영국의 도시들과 미국의 가정들에 끼친 영향을 다룬 것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최후의 승리를 위해 막중한 대가를 감수하는 보통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아는 작가들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들이었다. 1년 전에 재미있게 읽은 애가서 크리스티 작품을 각색한 “그리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를 알아본 순간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에드거 라이스 버로즈의 작품을 활용한 타잔 영화와 레슬리 차터리스의 더 세인트 소설,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레이엄 그린, 노엘 카워드, 조지 버너드 쇼의 작품을 각색한 영화들이 있었다. 정말 신이 났다. 최고의 순간은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와 샬로트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볼 때였다고 단언한다. 전쟁 전 디킨스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작품의 각색물을 볼 때보다 나이가 든 만큼 더 넓은 범위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연기와 감독 면에서 영화의 품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스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내 집착은 더 강해지고 들어오는 영화를 하나도 빼지 않고 보려는 욕심을 억누르기 어렵게 되었다. 또 하나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영화 제목과 주연 배우진, 심지어 제작회사까지 적어 나갔다. 일종의 중독 현상이었다. 푯값이 싸도 매주 몇 편씩 보는 데 적잖은 돈이 들었다. 꼭 보고 싶은 영화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를 접어놓고 잔돈 벌 일거리를 찾았다. 학교에서 스포츠 활동도 계속하고 졸업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 신기한 일이다.

3년 반 점령기가 내 삶을 바꾸어놓았다. 네 개 장소에서 지냈고 이포 도시의 양쪽 구역에서 모두 살아봤다. 그전에는 중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중국인사회와 접촉이 별로 없이 지냈다. 점령기 동안 아주 다른 배경의 여러 집안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코르 씨의 호끼엔 집안, 헝화의 예 부인, 학까의 리 집안과 충 집안. 말라야의 양대 공용어인 광둥어와 말레이어를 나름의 방식으로 쓰는 사람들이 어느 곳에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뜻밖의 일은, 시내에서 영어를 듣거나 말하는 일이 아주 없어졌는데도 앤더슨학교 다닐 때보다 더 많은 책을 영어로 읽고, 라디오를 통해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온갖 말씨의 영어를 듣게 된 것이다. 길에서 말레이인을 보는 일은 없고 도시 외곽의 그네들 캄퐁(동네)을 지나갈 때만 봤다. 인도인을 본 것은 예 부인 집에서 지낼 때뿐이었다. 그 길 꼭대기에서 토디를 파는 날 인도인 노동자들과 어울려 함께 마실 때가 있었다. 전쟁 전에 알코올 맛을 본 것은 대개 설 명절 때 쌀을 발효시켜 와인 비슷하게 만든 것이었다. 토디는 그와 달리 인도인 노동자들을 길에서 비틀거리게 만드는 술로, 내가 처음 맛본 독주였다.

그러나 점령기를 통해 내가 만나고 어울린 것은 거의 중국인이었다. 광둥어가 늘고 학까 친구들과 쉽게 어울릴 만큼 그 말도 익혔다. 호끼엔 말은 덜 익숙했고 내가 배운 것은 그중의 페낭 말씨로, 원어민들이 타락한 형태로 여기던 말씨였다. 일본어는 밍테소학교에서 석 달 동안 매일 수업을 듣고 군가를 배웠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일본인과 대화한 일은 없고 몇 개 일본 영화에서 들었을 뿐이다.

3년 동안 상영된 영화 중에는 점령 하의 상하이에서 만든 중국 영화도 있었다. 그중 좋아한 것은 아편전쟁을 배경으로 영국인이 악당으로 나오는 “만세유방(萬世流芳)”, 서유기의 유명한 철선공주(鐵扇公主)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그리고 아주 어리고 예쁜 리리화(李麗華)가 노래부르는 뮤지컬 “만자천홍(萬紫千紅)” 세 편이었다. 사춘기의 내게 그 흥겨운 뮤지컬은 깊은 인상을 남겨서 후에 쓰려고 시도한 소설에 그 엉성한 플롯을 활용했다.

전에 받은 식민지교육을 부정하는 성장의 시기였다. 또한 아버지가 내게 심어주려 하신 고전언어의 세계를 해체한 시기이기도 했다. 학교 다니지 않는 몇 해 동안 다른 종류 공부 방식을 나는 익혔다. 공부를 위한 시설이 없는 조그만 중국인 도시에 갇혀 있으면서도 관찰하고 어울릴 자유를 누리며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어떤 공식적 집단이나 제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궁금한 일을 알아내도록 노력할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내를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며 익힌 정신적 습관들은 오랫동안 내 핸디캡으로 남았다. 아주 오랜 뒤에야 내 경험 속에 일종의 자아발견 과정이 들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깨우침은 이론과 추상적 관념의 추구보다 개인의 성향과 사회적 현상의 이해에 내가 더 끌린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나는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학교에 돌아갔지만, 그 후에 내가 교육을 받아들이는 자세에는 그 시절의 초점 없는 공부 방식에서 받은 영향이 매우 컸을 것이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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