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연합 의료지원단, 계엄령 포고부터 지금까지…4개월 간의 활동 공유

2024년 12월 3일. 45년만에 선포된 비상계엄령으로 나라가 크게 흔들렸다. 우리가 딛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 반대로 계엄령이 선포되던 날 밤부터 지금까지 두 발 벗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민주의식의 얼마나 높았는지를 절감하면서. 감히 K-시민의식이란 말을 붙이고 싶을 정도로.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하 보건연합) 소속 의료인을 비롯한 활동가, 학생 등은 12‧3 계엄 직후부터 현재까지 전국에서 매주, 매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의료부스를 꾸려서 혹은 의료지원 가방을 메고, 시민이 모이는 곳에 함께했다.
보건연합은 지난 12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12층 세미나실에서 ‘탄핵운동 4개월 돌아보고 나아가기 : 보건의료-건강권운동 정세 및 활동토론’을 개최했다.
1부 보건연합 우석균 공동대표의 발제에 이어 2부에서는 지난 130일 간 68번 그 이상의 집회가 열리는 동안 의료부스에서, 거리에서 시민들의 건강을 돌보며 연대한 기록을 톺아보는 ‘보건연합 의료지원단 활동 네달의 기록 : 수고했어요 우리 함께한 발자취’가 이어졌다.
(구)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비상행동 (현)내란청산‧사회대개혁비상행동(이하 비상행동) 의료지원 팀장이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서영 기획국장이 나와 활동보고를 진행했다.
“나은 사회를 열망하며…서로를 돌본 광장”
이서영 기획국장은 지난해 12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같은 달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던 여의도, 그리고 광화문, 동십자각, 서십자각, 남태령 철야, 한남동, 헌법재판소 앞 등 집회‧시위 현장을 되짚었다.
그는 “탄핵안이 가결된 12월 14일까지 2주간 여의도에만 한주에 50명 이상의 의료인과 학생이 많이 모였고, 이 때 보건의료청년학생모임이 제안돼 활발하게 모였다”며 “이후에 계속 의료지원단도 하고 또 핫팩과 의료민영화 쿠데타 전단지도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렸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국장은 “12월 21일 트랙터를 끌고 서울로 올라온 농민을 막아선 경찰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들이 달려갔다. 시민들이 모이기 전까지 경찰은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했고 숫적으로 압도했을 때 잠잠해졌다. 철야 후 다음날 아침에 진료지원을 했고 이후부터 철야집회가 유행을 해서 힘들었지만 오히려 고무되는 면이 있었다”며 “이어 한강진으로, 한남동으로 이어진 3박4일의 집회로 상태가 안좋아진 시민들이 많았고, 우리도 교대근무를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폐렴 환자, 희귀질환자, 암투병 환자 등 모두가 가리지 않고 나오셔서 의료부스를 지킬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시민의 힘이 있어 윤석열이 구속됐다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또 헌재의 판결 지연, 검찰의 방해 등으로 탄핵 정국이 길어지고 시위가 광화문 동십자각으로 옮겨진 이후 동력이 좀 떨어지고, 여의도 만큼의 인파가 몰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한 광장의 힘을 느꼈다고.
이 국장은 “광화문에서 서명운동을 진행했는데, 시민들이 오셔서 알아서 다 해주셔서 굉장히 편했다. 아무런 노력(?) 없이 9천명의 시민의 서명이 삽시간에 모였다. 정말 세상을 바꾸고자하는 시민들의 큰 열망을 느꼈다”며 “정치권 한편에서 미적거리는 동안 3월 8일 내 생일이었는데, 윤석열이 석방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그 때부터 비상행동도 절박함과 공포감으로 매일 집회를 열고, 일부는 단식에 들어가고 의료지원단도 매일 나가서 함께 끈질기게 싸웠다. 4월 1일 파면 선고 일자를 받고, 선고가 나던 4일까지 헌재 앞으로 자리를 옮겨 매일 집회를 했다”고 전했다.
그때까지 시위에 참여하고 의료부스를 지원하면서 이 국장은 광장에서의 ‘연결감’을 깊이 느꼈다고 술회했다. 그는 “기존 회원 분들에게 초대장을 보낼 일이 총회 말고는 거의 없었는데, 자주 봬서 너무 좋았고, 새로운 회원들도 많이 들어 온 것도 좋았다”며 “매주 연단에 올라오는 자유발언하시는 분들, 장애인, 성소수자, 희귀질환자, 동덕여대생 등 광장의 구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계엄령 때문에 이렇게 모이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사회보험에 회의적일 것이고, 의식적으로도 개인화‧분절화 됐다고 생각했는데 광장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고, 남태령 대첩 때 지하철역 화장실에 쌓인 생리대와 구강청결제, 핫팩 등을 보면서 사회운동이 희망이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내란 때문에 생긴 모든 일들이 건강에 대한 위협처럼 느껴졌지만, 나은 사회를 위한 열망을 갖고 나온 시민들이 서로를 돌보는 것을 목격한 광장이었다”고 마무리 했다.
“계속 우리 광장에서 만나요”
이어 부산경남 인의협 노동현 회원은 부산과 대구에서 벌인 의료지원 활동을 공유했다. 그는 “12월 8일부터는 주 2회 의료지원을 나갔고, 3월 10일부터는 주6회 나갔다”며 “시민 발언자로 참여해 의료농단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고, 보건의료청년학생모임을 조직하고, 노조나 건치와 연대하며 계속 활동을 꾸려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또 대구 행동하는간호사회(이하 행간) 최은령 회원은 “계엄령이 터지고 사람들이 모인다는 얘기를 듣고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 일단 집에 있는 압박붕대랑 핫팩을 챙겨 나갔다”면서 대구에서는 대구역 앞에서 매주 토요일 집회를 했고, 별도의 의료부스는 없이 응급키트를 들고 다니며 아픈 시민들을 돌봤다. 그런데 물자와 인력이 부족했고, 몰라서 이용하지 못하는 시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대전과 서울 집회에서 의료지원단에 참여한 작업치료학과 학생은 “탄핵안 가결 이후부터 집회에 참석했다. 대전은 인원이 적을 때는 20~30명 모인 적도 있어, 여태 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송수민 활동가는 “부산에서는 12월 내내 집회가 열렸고, 여고생과 성노동자들의 발언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며 “12월 28일 내란동조 발언을 한 수영구 박수영 의원 사무실을 찾은 경성대‧부경대 학생들의 집회에 결합해 농성을 이어갔다. 지역에서의 집회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 날을 손에 꼽는다는 행간 김서안 학생회원은 지난 3월 25~26일 남태령 2차 대첩 당시의 경험을 공유했다. 그는 “SNS를 보니 농민분이 경복궁 역으로 와달라고 해서 가니까, 트랙터는 견인차에 연결돼 있었고 이를 나가지 못하게 시민들이 이중삼중으로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며 “그렇게 버티고 있는 분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대부분 손과 무릎이 까졌고, 민변 선생님은 경찰의 폭력으로 쓰러져있었다. 공황장애가 온 분도 있었다. 그렇게 트랙터를 지킨 시민들의 힘으로 파면을 이뤄낸 것 같다”고 말했다.
행간 윤혜림 학생회원도 “남태령 2차 대첩 때, 경찰의 폭력진압은 살벌했고, 화가 난 시민들이 스크럼을 짜고 경찰 방패를 막아섰다. 나는 그 때 철야가 처음이라 너무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울었다. 나도 의료인이고 아픈데, 누가 날 돌봐주나 하는 생각에 서러웠다”며 “그런데 주변분들이 나를 계속 다독여 주셨고, 좋은 말들을 해주셨다. 모두가 서로를 돌보고 있는데, 경찰은 시민을 다치게만 했다”고 경험을 공유했다.
대경인의협 김동은 진료사업국장은 “대구에서 진료가방을 메고 집회 때마다 맨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봤다”며 “한남동 철야 농성 때 하루 나간 적이 있는데, 그 추운날 대열 사이를 다니며 핫팩을 나눠주는 의료지원단의 모습을 보면서 연대를 새삼 다시 배웠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구미 지역의 옵티컬 고공농성자 연대도 1년 4개월째 계속하고 있고, 앞으로도 연대할 상황과 지역은 계속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행간 정원구 회원은 “주로 서울 집회에 참여했지만, 거주지인 춘천 집회에도 참여하려고 노력했다”며 “만약 의료부스가 없었다면 참석을 망설였을 것 같은데, 모임을 조직해 주신 덕에 저같이 용기 없는 사람도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 감사하다”고 전했다.
보건연합 전진한 정책국장은 “의료부스하길 잘했다. 우리 모두 서로가 집회에 나오는 걸 보면서 용기를 얻었다”며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지만, 오늘 모두의 이런 고백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계속 광장에서 만나자”고 당부했다.
한편, 비상행동은 오는 19일 오후 5시부터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내란종식, 사회대개혁을 위한 시민행진’을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