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계엄 당시 학교 측 ‘학생 귀가 조치’
“정부 쪽에서 문체부 경유해 학교에 지시”
학생들 “인권침해···총책임자 밝혀져야”

지난해 12월3일 불법계엄 사태는 6시간 천하로 끝났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 서울 성북구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석관동 캠퍼스에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현재 비상계엄 선포 중에 있습니다. 출입자 통제를 시행하므로 모든 학생은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미술·영상 등 야간 작업을 하려 남은 이들이 많은 밤이었다. 이날 미술원 에 있던 조형예술과 21학번 박모씨(23)는 영상 작업을 하다가 당직 직원으로부터 “계엄 때문에 나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몇몇은 대중교통 막차가 이미 끊겨 “집에 어떻게 가냐” 걱정했다. 특수한 상황에 놀랐는지 울음을 터뜨린 사람도 있었다.

박씨는 2일 통화에서 “학교에 모여 있는 게 제일 안전할 것 같은데 왜 나가야 하는지 납득이 안됐다”고 그날을 회상했다. 밤샘작업이 많아 불이 꺼질 일 없던 캠퍼스가 그토록 캄캄한 것을 박씨는 그날 처음 봤다고 한다. 그날 학교 후문에는 ‘출입 통제’를 알리는 종이가 붙었다.
당시 이같은 출입통제 조치가 이뤄진 대학은 한예종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단 두 곳 뿐이다. 다른 국립대도 있는데 왜 두 곳만 폐쇄됐을까. 한예종 석관동캠퍼스가 과거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안기부 청사로 오랫동안 사용됐던 터라, 체포한 인사들을 이곳에 구금하려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지만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경향신문이 12·3 불법계엄 1년을 맞아 만난 한예종 학생들은 ‘누가, 왜 출입통제를 지시했나’를 물었다.
출입 통제의 밤 이후 학생들은 직접 그날의 증언과 사진·영상 자료를 제보받아 모았다. 교내 구성원 등 1286명의 연명을 모아 학교와 문체부에 학생 귀가 조치가 이뤄진 경위를 물었다. 학내 단체 돌곶이포럼 등은 지난해 12월31일 김대진 당시 한예종 총장과의 면담을 진행했다.
돌곶이포럼이 공개한 면담 내용에 따르면, 학교 측은 “정부 총당직사령실이 문체부 당직실을 경유해 학교 당직실로 지시를 내렸고, 총장은 조치에 따르기로 했다”며 “학생의 안전”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소통은 유선으로 이뤄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전했다.
‘전화 한 통’에 학교가 학생을 밖으로 몰아냈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이 조치가 더 심각한 자유의 침해로 이어졌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총장 면담 등에 참여한 방송영상과 21학번 여인서씨(25)는 “학교 문이 닫히는 건 단순 학습권 침해 뿐 아니라 표현의 자유의 침해까지 연결될 수 있다”며 “더욱이 한예종은 역사적으로 ‘한예종 사태’(2009)나 예술인 블랙리스트 등으로 자유를 억압당했던 역사가 있다”고 했다.
여씨는 지난해 12월16일 문화예술계 116개 단체가 한예종 폐쇄에 관해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장관을 고발할 때, 재학생 대표로 기자회견에 참석하기도 했다. 한예종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가 문체부 산하 국립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유인촌 당시 장관이 계엄에 깊숙히 관여한 것 아니라는 관측도 나왔던 터다. 하지만 유 전 장관은 계엄 선포 이후 국무총리실의 지침을 산하 기관에 전파한 것뿐으로, 자신은 이 과정에 개입한 바 없다는 입장이다.
여씨는 그간의 수사 상황을 지켜보며 “답답한 마음”이라며 “조치를 내린 총책임자가 누군지 명확히 밝혀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저희가 겪은 일은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수사돼야 할 부분이 많다 보니 이 안건이 후순위로 밀려나는 건 아닌가, 속상함이 있다”고 했다.
불법계엄이 만약 해제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학생들은 이따금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미술이론과 23학번 방세희씨(22)는 “다음 날부터 학교는 못 나오는 곳이지 되지 않았을까”라며 “과거에 학교 건물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터였고, 국가에 소속된 부지이니 이 건물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했을까, 하는 추정을 해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3일 학교에 있다가 퇴거 조치를 당한 그는 학교 본부와 학생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방씨는 “정치, 군사적 위기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 학교는 이번에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너희를 밖으로 내쫓지 않는다’는 걸 보이지 못했다”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더라도 한 번쯤은 이 사건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신뢰가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희망을 찾자면, 학교 및 사회 현안에 관심을 갖는 학생이 늘었다는 데 있다. 방씨는 “계엄의 밤 이후 일어나는 크고작은 학내 정치적 사안에 성명서나 대자보, 연대체가 전보다는 활발해졌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박씨도 그날을 계기로 집회와 인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최근에는 팔레스타인 이슈에도 눈길이 간다”며 “예술에 있어 너무 중요한 표현의 자유가 침해 당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낀 계기였다”고 했다.
“저는 그냥, 그날 왜 학교를 닫으려고 했는지 그게 궁금할 뿐입니다.” 박씨가 끝으로 말했다. 학생들의 의문은 현재 진행형이다.







